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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조문 인물과 발자취,묘소

조우인(曺友仁)이 배향된 봉산서원과 임어재

by 안천 조각환 2024. 7. 27.

이재(頤齋) 조우인(曺友仁,1561~1625)선생이 배향된 상주 봉산서원과

그가 은거하다가 여생을 마쳤으며, 사당이 있는 상주 매호리를 찾아본다.

 

봉산서원이 자리한 상주 화서면 금산리 서원앞 봉산지

 

이재 조우인선생의 약력을 간단히 살펴보면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 이재(頤齋)이며

예천에서 출생. 우부승지 조계형(曺繼衡)의 증손자이다.

조우인은 1588년(선조 21)에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됐고,

1605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1616년(광해군 8)에는 함경도경성판관을 지냈다.

 

봉산서원 정문인 진덕문

 

1621년에는 제술관(製述官)으로 있으면서 광해군의 잘못을 풍자했다가

그 글로 말미암아 3년간 옥에 갇혀있던 중 인조의 등극으로 풀려나

이곳 상주(尙州)의 매호(梅湖)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봉산서원 전경

 

봉산서원은 상주시 화서면에 있는 조선후기에 창건한 서원이다.

1708년(숙종 34) 노수신(盧守愼), 심희수(沈喜壽), 성윤해(成允諧)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며, 그 뒤 김홍미(金弘微),

조우인(曺友仁), 정호선(丁好善), 황익재(黃翼再) 등을 추가 배향하였다.

 

봉산서원(鳳山書院) 강당

 

1771년과 1841년에 중수하였으며,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83년 4월에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4칸의 강당, 5칸의 재소(齋所),

4칸의 고사(庫舍)와 봉산지부도신도비(鳳山池浮島神道碑),

봉산지 사적비(鳳山池史蹟碑), 하마비(下馬碑) 등이 있다.

 

강당 대청

 

강당의 편액들 : 봉산서원, 봉산서원중건기, 봉산서원중건상량문, 향사 분정판

 

경현묘(景賢廟,사당)

 

사우에는 노수신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심희수,

성윤해, 김홍미, 조우인, 정호선, 황익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매년 2월 중해(中亥 : 두 번째 亥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사당과 내삼문

 

노수신(盧守愼,1515~1590)은 1543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전적·수찬을 지냈다.

1547년 을사사화가 일어났을 때 이조좌랑에서 파직되어

순천으로 유배되었고, 1547년 정황과 함께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고 진도로 옮겨 19년간 귀양을 살았다.

 

봉산서원 강당과 건물들

 

노수신은 1567년에 풀려나 교리·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

대제학을 거쳐 1573년 우의정, 1578년 좌의정, 1585년 영의정이 되었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한 일이

문제되어 파직 당했다.

이황·기대승 등과 주자의 인심도심설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봉산서원 입구의 노수신선생 시비

 

밤에 앉아서

 

곧추 앉아 자세부터 가다듬으니

놓쳤던 마음 바로 돌아 왔건만

고삐 풀린 말처럼 내닫지 못하게 하자니

싸늘하게 식은 재 같이 될까 두려워라.

 

굶주린 쥐는 느릿느릿 가다 멈추다 

가벼운 바람은 절로 오고 가느니

어찌 굳이 눈과 귀를 닫아야만 하리.

텅 비어 하나 된 마음 지니기 어려웁구나.

 

상주 사벌국면 매호십리강산

 

매호십리강산(매호리)은 이재 조우인선생이 1623년 승지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인조로부터 국록으로 국사봉과 함께 하사받은 곳으로

매호정사를 짓고 지내면서 "매호별곡"을 읊으며 여생을 보낸곳이다. 

낙동강변의 아름다운 곳으로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지금까지 450여 년간을 살아오고 있는 곳이다.

 

마을 안쪽의 사당앞 임어재(臨御齋,재실)

 

이재 조우인선생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

이재(頤齋)이며 예천에서 출생. 우부승지 조계형(曺繼衡)의 증손자이다.

조우인은 1588년(선조 21)에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됐고,

1605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1616년(광해군 8)에는 함경도경성판관을 지냈다.

1621년에는 제술관(製述官)으로 있으면서 광해군의 잘못을 풍자했다가

그 글로 말미암아 3년간 옥에 갇혀있던 중 인조의 등극으로 풀려나

이곳 상주(尙州)의 매호(梅湖)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이재 조우인 위패를 봉안한 사당

 

조우인의 상계(上系, 윗대)를 잠시 살펴보면

녕조씨(昌寧曺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의 사위인 조계룡(曺繼龍)이며,

중시조(中始祖)는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사위인 조겸(曺謙)이시다.

이후 혼돈의 시기를 거쳐 갱기(更起)로 다시 정리하여, 조겸의 16세(世)인 

송무(松茂), 송군(松君), 송학(松鶴) 삼형제 1세로 하고있디.

 

조우인(曺友仁)선생 위패 ~ 조우인선생의 12대손 조익현(曺益鉉) 종친의 안내로 참배

 

송군의  7세손인 조흥(曺興) 고려말 중훈대부(中訓大夫) 

태복시경을 역임하였으며, 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그는 계림(桂林), 상림(上林), 중림(中林) 세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첮째인 조계림(曺桂林)의 후손들은 진해지방에 세거하고 있다.

 

창녕조씨 이재공파 종회창립기념비, 임어재상량문, 출새곡, 임어재건립기

 

조흥(曺興)의 둘째 아들인 조상림(曺上林) 무당상절제사(武堂上節制使)

역임한 고려의 충신이었으며, 조선 태조로부터 상호군(上護軍)으로

명 받았으나 사양하고, 지금의 창녕군 대합면 개복리로 귀향하였다.

상림의 아들 조명수(曺命壽)는 성균생원(成均生員)이며 증(贈) 병조참의다.

명수(命壽)의 아들 조순(曺珣, 瑞)은 부사직을 역임했으며 증(贈) 이조참판이다.
아버지인 조명수(曺命壽)까지는 창녕에 세거했으나, 아들인 조순(曺珣, 瑞)

상주(尙州)로 이사를 해서 상주(尙州)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조계형(曺繼衡) 초상화

 

순(珣)의 차자(次子)인 조계형(曺繼衡)은 종2품 호조참판 종2품

가선대부 좌부승지를 역임했고, 창성군(昌城君)으로 봉군(封君)되었다.

조계형(曺繼衡)의 재실은 상주 공검면에 경모재(敬慕齋)가 있다.

계형(繼衡)의 장자(長子)인 조언홍(曺彦弘)은 증(贈) 병조참의이며,

언홍(彦弘)의 차자(次子)인 조몽길(曺夢吉)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내고 

증(贈)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판관이고 합천 입향조(入鄕祖)이다.

 

마을입구의 임호정(臨湖亭)

 

임호정에 걸린 편액들

임호정, 임호정중건기, 매호별곡, 임호정 이건상량문,

임호정 중건 조양진(曺亮鎭)숭조비, 임호정 건립추진 내력

 

출새곡(出塞曲)  ~ 조우인(曺友仁)

북방 이십여 주에 경성이 문호인데 / 군사 백성 다스리기를 나에게 맡기시니

망극한 임금의 은혜 갚을 길이 없구나.

서생의 일은 글쓰기인가 여겼더니 / 늙은이의 변방부임 진실로 뜻밖이로다.

​임금께 절하고 칼을 짚고 돌아서니 / 만 리 밖 국경에 내 한 몸 다 잊었다.

 

흥인문 내달아 녹양평에 말 갈아타고 / 은하수 옛길을 다시 지나간단 말이냐.

​회양 옛 사실 소문만 들었더니 대궐을 / 중국 한나라 무제(武帝) 때 급장유(汲長孺)가

회양 태수로 선정을 베풀었던 일 / 홀로 떠나는 적객은 무슨 죄인가.

임금곁을 떠나 경성으로 부임하는 자신의 신세 / 높고 험한 철령을 험하단 말 전혀 마오.

 

세상살이에 비하면 평지인가 여기노라 / 눈물을 거두고 두어 걸음 돌아서니

서울이 어디요 대궐이 가렸도다 / 임금을 떠나는 안타까움

안변 북쪽은 저쯤에 오랑캐 땅인데 / 오랑캐를 정벌하여 천 리 밖 몰아내니

윤관 김종서의 큰 공적 초목이 다 알도다.

 

용흥강 건너와 정평부 잠깐지나 / 만세교 앞에 두고 낙만루에 올라앉아

옥저의 산하 하나하나 돌아보니 / 함경도 함흥 일대에 위치했던 고대 국가

천년의 풍패에 상서로운 기운 어제인듯 하구나.

함관령 저문 날에 말은 어찌 병들었는가 / 모래바람 자욱한데 갈 길이 멀었구나.

 

홍원 옛 고을의 천관도를 바라보고 / 대문령 넘어서 청해진에 들어오니

함경도의 요해지요 남북의 요충지라 / 충신과 정예 병사 무기를 늘어 놓고

강한 활과 쇠뇌로 요충지를 지키는 듯 / 태평세월 백년동안 전쟁을 잊으니

철통같은 방어를 일러 무엇하리오. 

 

*출새곡은 조우인이 56세 되던 해 함경도 경성 판관으로 임명되어 떠날 때

변방으로의 부임 과정과 임지 생활에서 느낀 소회 등을 기록한 기행가사로

2023년 9월 고1 모의고사는 물론 고교시험에 자주 등장하는 가사이다.

 

이재 조우인선생 문학비(頤齋 曺友仁先生 文學碑)

 

이재 조우인(曺友仁)의 증조부는 우부승지 조계형(曺繼衡,1470~1518)이고,

조부는 조언홍(曺彦弘)이며, 조언홍은 6형제를 두었는데

첫째가 몽석(夢錫,무후), 둘째는 몽길(夢吉,합천), 셋째가 몽열(夢說,제천),

넷째가 증 이조판서인 조몽신(曺夢臣,1532~1593,상주)으로 예천군 노포리

(현 예천 개포면)에서 이재(頤齋) 조우인(曺友仁)을 낳았다.

다섯째는 몽상(夢祥,상주 매호, 상리), 여섯째는 몽윤(夢尹,의성 안계)이다.

 

이재 조우인선생 문학비 앞.뒤면(조우인선생 생애)

 

그의 가사집 이재영언(頤齋詠言)에는 매호별곡(梅湖別曲)·

자도사(自悼詞), 관동속별곡(關東續別曲), 출새곡(出塞曲) 등  4편의

가사작품이 실려 전하는데, 특히 매호별곡은 1624년경 그가 노경에

은거하던 바로 이곳 상주시 사벌국면 매호리에서 자연을 벗하며

한가롭게 살아가는 소박한 선비의 정경을 노래한 작품이다.

 

매호별곡(梅湖別曲) 시비

 

(중략)

이끼 낀 바위에 기대어 앉아 보며

그늘진 송근(松根)을 베고도 누워 보며

한담(閑談)을 못다 그쳐 산일(山日)이 빗겨시니

심승(尋僧)을 언제 할고 채약(採藥)이 저물거다.

 

그도 번거로워 떨치고 걸어 올라

두 눈을 치켜뜨고 만 리를 돌아보니

외로운 따오기는 오며 가며 다니거든

망망속물(茫茫俗物)은 안중(眼中)에 티끌이로다.

 

부귀공명 잊었거니 어조(魚鳥)나 날 대하랴

낚시터에 내려앉아 백구(白鷗)를 벗을삼고

술동이를 기울여 취토록 혼자먹고 

흥진(興盡)을 기약하여 석양(夕陽)을 보낸 후에

 

강문(江門)에 달이 올라 수천(水天)이 일색인 제

만강풍류(滿江風流)를 한 배 위에 실어 오니

표연천지(飄然天地)에 걸린 것이 무엇이랴

두어라 이렁성그러 종로(終老)한들 어이리.

 

*이 가사는 2021년 11월 고등학교 2학년 전국연합에 출재된 일부 내용이다.

 

낙동강변의 어풍대(御風臺)

 

어풍대는 상주시 사벌국면 매호리 낙동강변 둔치에 있는 대(臺)이다. 

조우인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落鄕)하여 매호리에 있을 때

 인조께서 이재(頤齋)같은 충절지사(忠節之士)가 지리풍수학적으로

여생을 보낼만한 안식처가 될 곳인지 어풍(御風, 임금이 보낸  풍수)을

보내 관찰하라고 하셨는데, 어풍이 왕명을 받고 매호에 도착하여

이 바위에서 산세와 지형을 관찰하고 갔다하여 "어풍대"라 이름하였다.

 

담양 한국가사문학관에 전시된 이재 조우인의 자도사

 

조우인(曺友仁)의 자도사(自悼詞)

임 향한 일편단심 하늘에서 타고나니 /  삼생의 인연이요, 지은 마음 아닙니다.
내 얼굴 내 못 보니 예쁘다고 할까마는 /  민낯이 곱든 밉든 생긴 대로 지녀 있어
연지와 백분도 쓸 줄을 모르는데 /  하얀 이 붉은 입술을 두었노라 하겠는가.
이 임을 만나 뵙고 섬길 일 생각하니 /  젊은 외모 믿자 하니 미모가 얼마이며(이하 생략)

 

*이 자도사는 3년간 감옥살이를 할 때에 억울하고 애절한 심정을

남녀관계에 빗대어 노래한 가사로서 제목의 "자도사(自悼詞)"는

스스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로서 곧 죽음을 각오하고 쓴 글이기도 하다.

이러한 조우인의 가사들은 교과서나 시험문제 등에 자주 등장한다.   

 

"시,서,화 삼절의 대쪽선비 상주 이재 조우인 종가" 표지

기획 : 경상북도,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2024.4월 발행)

 

상주 이재 조우인 종가 수록 목차

 

1.상주 사벌의 역사적 유래와 종가의 정착

2.이재 조우인의 삶과 대쪽기질

3.이재종가의 인물

4.이재종가의 고문헌과 건축문화

5.이재종가의 제례와 음식 문화

6.이재종가 사람들과 가풍전승(총 197쪽)

 

임어재앞 소나무

 

이재공파의 앞날에 임어재앞 소나무처럼  싱싱하고 늘 푸른 발전을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