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한강 이남 최대 규모의 감옥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이곳에 갇혔으며, 특히 216명(서훈 212명)의 독립운동가가 순국한
아픈 역사의 현장이요, 순국의 터인 옛 대구형무소 자리인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 2층에 대구형무소 역사관이 개관되었다.
순국의 터, 대구형무소 역사관
이곳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흔적을 생생하게 전시하므로써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재조명하고 후손들에게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역사교육 및 추모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성하여
지난 2025년 2월 27일 개관하였다.
대구형무소 역사관 입구(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 2층)
1층 입구 벽면
황혼(黃昏)
이육사(李陸史,1904~1944)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두러운 손을 힘께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 다오
저- 십이(十二) 성좌(星座)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森林) 속 그윽한 수녀(修女)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 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心臟)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沙漠)을 걸어가는 낙타(駱駝) 탄 행상대(行商隊)에게나,
아프리카 녹음(綠陰) 속 활 쏘는 토인(土人)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地球)의 반(半)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 다오
내 오월(五月)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來日)도 또 저- 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暗暗)히 사라지는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 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5월의 병상(病床)에서 (『신조선』, 1935.12)
대구형무소 역사관 안내
역사관 내부의 애국선열
애국선열(1)
1.한봉삼, 2.강무경, 3.고인덕. 4.김상태, 5.김원국, 6.김영백, 7.이종암,
8.김한종, 9.김화서, 10.노병대, 11.노임수, 12.박사화, 13.박상진,
14.박도경, 15.박수길, 16.박재혁, 17.배태근, 18.배종세, 19.신정백
애국선열(2)
20.심남일, 21.안창률, 22.조봉호, 23.양진여, 24.이석용, 25.윤대규,
26.장유계, 27.오성술, 28.전해산, 29.이동봉, 30.장진홍, 31.장학이,
32.조소영, 33.최성천, 34.강제형, 34.고태리, 35.이준윤, 37.김재화,
38.도무환, 39.김학이
대구형무소의 역사
1908.7.16 대구감옥 개청(경상감영), 1910.4월 삼덕동으로 이전,
1923.5.5 대구 형무소로 명칭변경, 1961,12,23 대구 교도소로 명칭변경
1971.6.1 달성군 화원면으로 이전, 2023.11.28 달성군 하빈면 현위치로 이전
수감번호 264 이원록(본명) = 이육사
이육사(李陸史)의 본명은 이원록(李元祿), 원삼(源三), 활(活)이며
1904년 경북 안동 출신으로 1925년 형 원기(源祺), 아우 원유(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에 가입, 1926년 북경 행,
1927년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파사건에 연루, 대구 형무소에 3년간 투옥됨
이 때의 수인(囚人) 번호 264를 자신의 아호(이육사,李戮史)로 삼음
1932년 북경의 조선군관학교 간부 훈련반에 입교, 1933년 졸업 후 귀국,
이 때부터 일경의 감시하에 체포와 구금생활 반복,
1935년 『신조선』에 시 "황혼"을 발표하여 등단
1943년 피검되어 북경으로 압송, 1944년 1월 16일 북경 감옥에서 사망
대구형무소 주요 수감인사
김영랑(金永郞)의 본명은 김윤식(金允植), 1903년 전남 강진 출신으로
휘문의숙 3학년에 재학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으로
내려가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준비 도중 발각,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불복, 공소 제기하여 대구복심법원으로 이송,
이후 1920년 일본으로 유학,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 귀국.
1930년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 이후 독(毒)을 차고, 가야금, 달마지, 춘향
등을 발표, 서울 수복 다음날이었던 1950년 9월 29일 유탄에 맞아 사망.
그들의 투쟁 주요사건
1.대구의 3.1운동, 2.조선은행 대구지점의 장진홍 폭탄 투척사건 등
창여(滄旅) 장진홍(張鎭弘, 1895.~1930) 의사는
1927년 일본 고관암살과 대구 조선은행, 식산은행을 폭파하려다
성공하지 못하고, 일반 오사카로 잠입하여 거사를 준비 하던 중,
체포되어 대구법원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1930년 1월 6일
복심법원(상고심)에서도 사형이 확정되자 옥중 순국했다.
박상진 옥중 절명시
다시 태어나기 힘든 세상에 / 다행히 남자로 태어났건만
이룬 일 하나 없이 저 세상 가려하니 / 청산이 비웃고 녹수가 찡그리네.
난부생차세상(難復生此世上) / 행득위남자신(幸得爲南自身)
무일사성공거(無一事成功去) / 청산조녹수빈(靑山嘲綠水嚬)
1.장진홍 의사 옥중 서신 2.장진홍 사건 사형 판결 기사
3.장진홍 사형 판결문 4.1959년 대구형무소 사진
1.박상진 의사 옥중 편지 2. 광복회 박상진 등 변론신청 기각
3.박상진 사형 판결문 4.박상진 사형집행(1921.8.13) 기사
뜨거웠던 투쟁 시대상
1. 태극단(대구 상업학교 중심, 단장 이상호 열사, 정완진 애국지사),
2.해성단(대구 계성학교 중심 5개조직)
대구 사범학교 학생운동
대구 사범학교 문예부, 연구회, 다혁당 소속 300여명 중 35명이 체포,
그중 강두안, 박제민, 박찬웅, 서민구, 장세파 5명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대구 계성학교 1918년 당시 전교생 사진과 일지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다
이종암(본명은 종순,鍾淳)은 1896년 달성 공산면 해안 출신으로
1914년 대구은행에 들어갔다가 독립운동가 구영필,김대지를
알게 되어 1917년 12월 은행돈 1만 900원을 꺼내 만주로 망명했다.
1918년 2월 퉁화 현(通化縣)의 독립군 군관학교에 입학했으며,
]1919년 11월 10일 김원봉 등 12명과 의열단을 창립했다.
묻힌 순국의 터, 대구형무소
이종암은 1922년 3월 중국에 온다는 일제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총살하기 위해 수차례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1925년 7월 잠입, 자금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926년 12월 28일 징역 13년형을 선고받고 대전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0년 병으로 가출옥한 뒤 죽었다.
옛 대구형무소 배치도
흑산일록
흑산일록은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1851~1926)이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파리장서(巴里長書)의 초안문을 작성하고,
성주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일제에 의해 구속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대구교도소에서 복역하다 그 해 10월에 석방되었다.
장석영은 석방된 이후 성주지역의 독립운동 전개와 옥중 생활을
정리해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흑산일록"이다
회당 장석영은 인동장씨 29세(世)로, 여헌 장현광의 후손이다.
대한광복회와 박상진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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