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은 화왕산 정상에 창녕조씨의 득성지지가 있고 본관이기도 한 고장인데.
매계 조위선생이 큰 일이 있을 때 마다 내려와 창녕 선조묘소를 참배했던곳으로
이곳 창녕 대지면 본초리(대초길)에는 김천 입향조이신 휘(諱) 심(深)선조의
증조부 이시며, 곧 매계선생의 5대조 되시며
환(煥)자 항렬의 20대조인 휘(諱) 원계(元桂)선대의 묘소가 있고,
창녕 남지읍 성사리(성사관당길)에는 휘 심(深)선조의 조부이시며
매계선생의 고조부 되시며, 환자 항렬의 19대조인 諱 우희(遇禧)묘소가 있다.
바로 아래에는 둘째아들인 익수(益修)의 묘소가 있으며, 특히 이곳 성사리의 묘소는
고려말 묘제양식이어서 경상남도 기념물 제60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원계 - 우희 - 경수(첮째 민수, 둘째 익수, 셋째 경수) - 심 - 계문 - 위)
휘(諱) 원계(元桂) 선조의 묘소는 창령군 대지면 본초리 대초주유소 맞은편에 있다.
이 산소는 시조이신 안강의 태사공 조계룡(曺繼龍)묘소를 제외하고는
현존 관리하는 창녕조씨의 가장 윗대 선조 묘소이다.
원계(元桂) 선조는 갱기(更起) 1세 송무(松茂)의 4세손 이시며,
매계선생의 5대조 되시고 환(煥)자 항렬의 20대 선조되신다,
고려말 중무지후(中門祗侯)이며, 찬성사(贊成事)로 추봉되었다.
약 600여년이 넘은 산소아다.
남지에 있는 조우희와 조익수의 묘 안내판으로
두분 묘소는 고려말과 조선초기의 전형적인 묘제양식으로 되어있어
경상남도 기념물 제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우희 선조의 묘소는 창령군 남지읍 성사리 관동(신주소로는 성사관동길)에
모셔져 있으며, 묘소 왼편 종산에는 단감나무를 2정(6,000평)정도 경작하고 있다.
우희(遇禧) 선조는 원계(元桂) 선조의 자(子)이며, 환(煥)자 항렬 기준 19대조가 되신다.
우희(遇禧)선조는 슬하에 민수(敏修), 익수(益修), 경수(敬修,찬성공) 삼형제를 두셨는데
셋째인 경수는 벼슬이 좌찬성에 올랐으며 김천의 찬성공파 중시조이기도 하다.
매년 음력 10.16일에 묘제를 모셨는데 2012년부터는 양력 10월 3째 일요일
덕원재에서 입향조(휘 심)와 합설하여 청사제로 지내고 이날은 성묘만 한다
월계석이 특이한데 상석, 비석, 월계석의 역할을 종합적으로 하고 있으며
월계석의 오른쪽에는 공(公), 왼쪽에는 배(配)의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려조정순대부판전의사사증좌시중부원군창녕조공휘우희지묘-
(麗朝正順大夫判典儀寺事贈左侍中府院君昌寧曺公諱遇禧之墓)
-배증정경부인성산이씨묘재창녕용장사서자좌-
(配贈貞敬夫人星山李氏墓在昌寧龍藏寺西子坐)
*조우희 선조의 부인이신 성주이씨의 묘는
창녕 용장사 서편자좌에 있는것으로 족보와 상석에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까지는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성산(성주의 옛 지명)이씨는 성주이씨의 중시조인 이장경의 손녀로
이장경은 백년(百年),천년(千年),만년(萬年),억년(億年),조년(兆年) 이렇게
다섯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셋째 아들인 시중공 만년(萬年)의 따님이다.
이 다섯아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우애도 깊었다고 전해진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공민왕 때 형제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황금을 강물에 던진 투금탄 형제이야기가(兄弟投金) 실려있는데
성주이씨의 가승(家乘)에 의하면 그 주인공이 바로 이억년과 이조년이 라고 한다.
뒤는 우희, 앞이 둘째 아들인 익수 묘소인데,고려말 조선초기의 분묘형태로 조성되어있다
.이 묘소는 모두 600여년이 경과된 여말, 조선조 초의 묘소들이다.
조민수(曺敏修)장군 묘소는 창녕군 대합면 신당리에 있으며
경상남도 기념물 제282호로 지정된 안내표지판이 있다.
조민수는 고려의 무신으로. 요동정벌군 좌군도통사로 출정한 뒤
위화도에서 이성계와 회군하여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361년(공민왕 10) 순주부사(順州府使)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물리쳐
공신 2등에 책록되고, 이듬해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를 거쳐
전리판서(典理判書)밀직사동지사(密直司同知事) 등을 지냈다.
1368년 명나라가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을 포위하자 좌상시(左常侍)로
의정주등처 안무사(義靜州等處安撫使)가 되어 명나라의 위협에 대처하고,
충근보리공신(忠勤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우왕 초 경상도도순문사로 왜구를 격퇴하고, 문하부지사(門下府知事)·
서북면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 1379년(우왕 5) 문하평리(門下評理),
1383년 문하시중(門下侍中)을 거쳐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다음해 밀직ㅜ사(密直副使)로 전라도 조전원수(助戰元帥)를 겸하고,
1385년 문하부판사(門下府判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군(遼東征伐軍)의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출정한 뒤
위화도(威化島)에서 이성계(李成桂)와 회군(回軍)하여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공으로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宣威同德安社功臣)에 책록되고,
양광·전라·경상·서해·교주도도통사(楊廣全羅慶尙西海交州道都統使)를 지냈다.
1389년(창왕 1)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하여 조준(趙浚) 등의 탄핵으로
창녕(昌寧)에 유배된 뒤 창왕의 생일에 특사로 풀려났으나,
우왕의 혈통을 에워싼 논쟁으로 이성계 일파에 대항하다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고,
이듬해 다시 창녕으로 유배되어, 이곳 창녕 배소에서 사망하였다.
- 조민수 장군의 직계 후손들은 주로 전남 보성, 순천등지에 거주하고 있으며,
묘사는 음력 2월 마지막 일요일에 모시고 있다
*참고로 셋째 아드님이시며 찬성공파의 좌찬성 휘(諱) 경수(敬修)선조의 묘소는
안타깝게도 파주군 장단면 군사분계선 안 민긴인 출입통제지역내에 있어
명절에 벌초도 성묘도 할 수 없는 곳이어서 70여년간 방치되고 있는바
언젠가 통일이 되면 후손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으로 찾아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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