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재는 봉산면 예지리 외입석(일명 바깥선돌)인 극락산 남편자락에 있다.
이곳 선영에는 창녕조씨 김천 입향조이고 매계 선생의 할아버지 되시는
휘 심(諱 深) 선조(환자항렬의 17대조)와 큰 아드님이신 선무랑 휘 승중(諱 承重),
10대조인 우졸당(遇拙堂) 휘 유(諱 逾)묘소 외 여러 선조들이 잠들어 계신곳이다.
조경수(曺敬修,좌찬성) - 심(深,참의공) - 계문(繼門,울진공) - 위(偉,문장공)
-사우(士虞,별제공) - 윤희(胤禧,영월공) - 익(瀷,묵제공) - 제창(悌昌, 참판공) - 유(逾,우졸당)
- 술(述,경매당)
덕원재 상량문(德源齋上樑文)
조석(朝夕)으로 송추(松楸,무덤주위에 심은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보호하니 경모하는 뜻
저절로 생기고 춘추(春秋)로 상로(霜露,계절의 변천)를 밟으니 처창(悽凔)한 마음 더욱 간절하네.
이는 당연한 천리(天理)요. 고연(固然)한 인사일세. 그러므로 선왕(先王)이 근본 보답하는
의례(儀禮)를 제정하고 후손이 조상 추모하는 정성을 다한다는데,
우리 참의공은 세족의 출신이요, 묘당(廟堂)의 명현(名賢)으로 불행이 국운이 다할 즈음 만나
왕조(王朝)의 교체 차마 볼 수 없었으니 죽림(竹館,죽림 속에 지어진 고토의 처소)에서
누가 밤중의 명월(明月)을 알손가? 율리(栗里, 중국 진나라때 徵土 陶潛의 고향)에서
스스로 상고의 청풍 즐기었네. 복지(福地)에 토배(菟裵,노은공이 은거하던 곳인데
전하여 은거하는 것을 뜻함)가 마련되니 시내는 봉계(鳳溪)를 유전(流轉)하고,
길지(吉地)에 의리(衣履)가 모셔지니 때는 우산(牛山)을 차지한지 벌써 5백년동안
자손이 번창하고 거의 20대(代) 가까이 가성(家聲)이 혁혁(赫赫)하여 작록(爵祿)을 서로 이었고,
시례(詩禮)를 능히 전수하니, 선덕(先德) 두터워서 그 음덕(蔭德) 저절로 두터운 줄 알겠고,
근원(根源) 장원(長遠)해서 그 유파(流波) 역시 장원(長遠)한줄 알겠네.
제향(祭享)은 이내 빠뜨림이 없으나 재사(齋舍)를 아직 건립하지 못하여 서로 깊은 유감
간직했다가 끝내 빠른 협의 이루어져 도끼질하고 톱질하니 신포(新甫,산이름)잣나무와
조래(祖徠)의 소나무 다듬어지고, 장엄하고 찬란하니 이루(離婁,옛날 눈 밝은 사람)의 먹줄과
공한자(公翰子,중국 노나라 교재,巧才) 의 먹통 거쳤으니, 단단한 담장 두루 바라 보건데,
저 물가에 엄연히 둘렀는데, 선덕(先德)을 추모하기 위해 이것으로서 편액을 걸고
후손을 계도하기 위해 이것으로서 규범을 삼았네.
이에 오량(五梁,들보를 다섯줄로 놓아서 짓는 집의 제도)으로 된 건물 준공되어
대위(大偉,다음의 기량대첩을 말함)로 된 노래 화답하누나.
어이어차 대들보 동쪽으로 향하니 구봉산(九鳳山) 꼭대기 하늘에 솟았구나.
봉(鳳)이 성대(盛代)찾아 내려온 이곳에 창문의 아침 해 대들보 서쪽으로 향하니
둥근 것은 못 굽은것은 둑일세. 밤낮없이 활수가 솟아나니 그 빛 하늘에 반사 되었네.
어이어차 대들보 남쪽으로 향하니, 시냇가의 벼와 기장 가을을 맞이했네.
저 망천(輞川, 중국 당나라 왕유,王維의 별장이 있는 곳)에만 좋은 별장 있다고 마소.
여기 전야에도 세 오솔길 그윽 하다오. 어이어차. 대들보 북쪽으로 향하니
극락산 어이 그리 웅장하고 신비의 지역에 맑은 기운 깊었으니,
예부터 뛰어난 재덕(才德) 배출되기 마련일세.
어이어차. 대들보 위로 향하니 신명을 감응시킨다는 말 거짓이 없네.
조상이 바로 앞에 있는 듯, 온 정성 다하니 의당 많은 복록(福祿)그지 없이 누리리.
어이어차. 대들보 아래로 향하니 금릉의 문물 누구나 다 축하하네.
온 동산 꽃나무에 봄바람 일렁이니 천륜을 다지는데 즐거운 일 많아서랴.
삼가 바라건데 상량을 마친 뒤에 제향(祭享)에 더욱 경건하고 재사가 점차 새로워지며
효도와 충성은 단연 계술(繼述,선대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것)하는데 있으니,
애모와 정성 다해 저존(著存,조상에 대해 애모와 정성을 다함으로써,
조상이 다시 생존한 듯 하고 앞에 나타난듯 하다 는 뜻)을 잊지 않았으면 하네.
아! 오늘의 이 성공으로 보아 반드시 영원한 보수 지속되리.
단기 4296년(서기1963) 10월 일 은진인 송우용(恩津人 宋友用) 기록하다
宗山 所有權 確定經偉. 參議公 墓碑 第二碑 建立및 德源齋補修 紀功記
여말 고려의 국운이 상잔하여 나라가 다함을 한하여 김산(현 김천)으로
낙향한 창녕조씨의 김산(현 김천) 입향조가 되며 뒤에 병조참의로 증직되었다.
1385년(을축,乙丑)에 출생하여 1414년(갑오. 甲午)에 졸(卒)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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