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암(馬岩)의 현재 소재지는 김천시 대항면 복전리이지만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영동군 황간면이었으며, 마암재(馬岩齋)가 있다.
이곳 선영에는 매계선생의 부친되시며 환(煥)자 항렬의 16대조이신
울진공 휘 계문(諱 繼門) 묘소를 비롯하여 15대조인 매계 위(梅溪 偉)의 묘소,
11대조(悌昌, 參判公)와 9대조(世龍, 認齊公) 그리고 고조(鎭汶), 증조(海永) 등
여러 선조산소가 모셔저 있으며, 묘사는 음력 10월 12일날이다.
-매계 조위선생의 父이며 울진 현령(증 가선대부)을 지냄-
증 이조참판 휘 계문 비문(贈吏曹參判諱繼門碑文)
공의 휘(諱)는 계문(繼門) 자(字)는 윤부(胤父)로 창녕인(昌寧人)이다.
증조(曾祖)는 증 문하좌랑중(贈 門下左侍中)으로 휘(諱)는 우희(遇禧)이고
조부는 봉익대부 밀직사사(奉翊大夫 密直司使)로 휘(諱)는 경수(敬修)이고
부친은 증통정대부 병조참의(贈通情大夫 兵曹參議)로 휘(諱)는 심(深)이고,
모친은 숙부인 서산정씨(淑夫人 瑞山鄭氏)로 태종14년(1414)에 공을 낳았다.
공은 삼군진무전농주부(三軍鎭撫典農主簿)와 현풍(玄風), 울진의 수령을 역임,
통훈대부품계(通訓大夫品階)에 이르렀고,
고향으로 돌아와 20여년동안 한가로이 지내다가
성종20년(1489) 2월 일에 금산(金山) 봉계리에서 76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으며
동24년(1493) 7월에 아들에 대한 은전(恩典)으로
희선대부 이조참판(喜善大夫 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공의 먼저 부인 하빈이씨(河濱李氏)는 일여(一女)를 두어
자헌대부형조판서 김종직(資憲大夫刑曹判書 金宗直)에게 출가하고,
다음부인 문화류씨(文化柳氏)는 일남 위(一男 偉)를 두어
현재 가선대부(嘉善大夫) 품계에 호조참판(戶曹參判)이고
측실(側室)의 소생은 6남 4녀로 아들 윤(倫)은 선약장군(宣略將軍)이고
전(佺)은 효력부위(效力副尉)이고 신(伸)은 통덕랑 사역원주부(通德郞 司譯院主簿)이고
장녀는 최송수(崔松壽)에게 차녀는 김식종(金諟種)에게 삼녀는 최맹준(崔孟濬)에게
출가했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공의 묘는 이해 5월 일에 황간 마암동 자좌(黃間 馬岩洞 子坐)에 모셔졌다.
성종24년 9월 일에 아들 위(偉)가 세우다.
증 이조참판 휘 계문 배 정부인 문화류씨비문
(贈吏曹參判諱繼門配貞夫人文化柳氏碑文)
부인(夫人)의 성은 류(柳)씨요, 문화인(文化人)이다.
조상인 휘차달은(諱車達)은 고려태조(高麗太祖)를 도와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녹훈(錄勳)이 대승(大丞)에 이르렀고 그 뒤로 휘공권(諱公權)과 아들인 휘택(諱澤)은
고려중엽(高麗中葉)에 참지정사(參知政事)와 승지(承旨)로 모두 명성이 있었고,
택(澤)의 아들인 문정공 휘경(文正公 諱璥)은 최충헌(崔忠獻)의 손자인 의(誼)를 베고
고려(高麗)의 왕실을 바로잡아 위두공신(衛杜功臣)에 녹훈되었고
경(璥)의 아들 휘승(諱陞)과 승(陞)의 아들 휘돈(諱墩)은 모두 높은 벼슬에 이르렀고,
본조(本朝)에 와서는 돈(墩)의 아들 휘량(諱亮)이 우리 태조(太祖)를 도운 공로로
좌의정(左議政)이 되었고, 량(亮)의 형 휘신(兄 諱信)도 높은 벼슬에 이르렀는데
바로 부인의 증조(曾祖)이고 신(信)의 아들 휘흡(諱洽)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고, 흡(洽)의 아들 휘문(諱汶)은 행주기씨(幸州奇氏)를 맞이하여 부인을 낳았고
부인은 증이조판서 창녕 조계문(贈吏曹判書 昌寧 曺繼門)에게 출가하여
일남 위(一男 偉)를 낳았는데 문장(文章)에 능하여 젊어서 과거에 응시하여
제6위(第六位)로 합격하고 성종(成宗)의 지우(知遇)를 만나 현재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있다.
부인이 연산왕 원년(燕山主 元年,1495) 10월 일에 69세를 일기로 금산 옛집에서 별세
이해 모월 모일에 황간에 있는 증이조참판공(贈吏曹參判公)의 묘에 부장(祔葬)하게되자
위(偉가 서울로 편지를 보내어 이제는 그만이요, 내가 다시는 어머님을 뵐 수 없게 되었소,
나의 어머님은 일생동안 많은 부덕(婦德)을 남기셨는데 이대로 인멸되어 버릴까 걱정이요.
숨은 덕행을 드러내 먼 후세에 보이려면 문헌이 없고는 아니 될 것이오.
더욱이 우리집안의 일을 잘 알기로는 공(公)만한 이가 없으니
공은 부디 어머님의 銘을 지어 달라. 고 부탁하였기에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애도(哀悼)해 하였다.
사실이 그렇다. 부인은 천성이 온화, 인자(溫和, 仁慈)하여 여러 종친을 대하는 데는
멀고 가까운 차별이 없이 일체 은(恩)과 신(信)을 위주로 하였고,
여러 측실(側室)을 거느리는 데는 조금의 질투도 없었고 여러 서출(庶出)을 양육(養育)하는데는
친생(親生)과 똑같이 하여 은애(恩愛)를 조금도 소홀이 한 적이 없었다.
평소에 화사한 것을 싫어하여 의복이나 음식이 검소하였고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하여
집에 저축될 여유가 없었고 제사를 모시는 데는 의례 손수 장만하여 그 성(誠)과 경(敬)을 다하였다.
노복(奴僕)들은 그 인자(仁慈)에 감화되어 아무리 부인(夫人)이 모르고 있는 일이라도
감히 속이려하지 않았고 이웃에서는 그 은혜에 감격하여 아무리 변변치 않은 음식이라도
의례 부인에게 먼저 드린 뒤에 먹곤 하였으니, 어질지 않고서야 어찌 이러하겠는가?
이 몇 가지는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므로 명(銘)을 지어 찬양할 만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문화(文化)에서는 류씨(柳氏), 창녕(昌寧)에서는 조씨(曺氏)로, 성(姓)은 쌍미(雙美)를 이루었고
한 아들은 명성이 높았으니 큰 벼슬로 문벌을 부흥시키고, 조상을 빛낸 이는 곧 관찰사이지만
부인(夫人)의 숨은 덕(德) 들어내고 맑은 행(行) 전파시켜 오랠수록 보존하는데
나의 글까지 있고 보니 금릉의 옛집과 황간(黃間)의 새 무덤은
그 광채 인멸되지 않고 천년만년 유지하리.
허백당 홍귀달 찬(虛白堂 洪貴達 撰)
문장공 매계선생 묘지명(文莊公梅溪先生墓誌銘)
공(公)의 휘(諱)는 위(偉), 자(字)는 대허(大虛), 창녕인(昌寧人)이다.
고(考,부친)의 휘(諱)는 계문(繼門), 울진현령으로 증(贈)에 이조참판(吏曹參判)이요,
조(祖)의 휘(諱)는 심(深)이요 증병조참의(贈兵曹參議)이며, 증조(曾祖)는 휘(諱) 경수(敬修)로
단성좌명공신밀직사(端誠左明功臣密直司)에 증의정부좌찬성(贈議政府左贊成)이다.
울진공은 문화류문(文化柳汶)의 따님을 맞이하여 경태(景泰,명나라 연호) 갑술(甲戌,1454) 7월에
공을 낳았고, 공(公)이 7세에 능히 시를 하였으므로 신기출인(神氣出人)이란 말이 있었다.
당숙부(堂叔父)인 조충간공 석문(曺忠簡公 錫文)이 보시고 기이하다하며 가숙(家塾)에
머물게 하고 글을 가르침에 날로 진전하여 임진(壬辰,1472)년의 사마양시(司馬兩試)에,
갑오(甲午,1474)년 문과에 발탁되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로 배명(拜命)받고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옮겨졌다. 성종(成宗)이 별도로 유신(儒臣)을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하여 최연소(最年少)의 공(公)을 뒷날 수직(首職,首相)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어 홍문관정자, 저작박사 수찬 사헌부지평 시강원문학 홍문관교리 응교
(弘文館正字, 著作博士 修撰 司憲府持平 侍講院文學 弘文館校理 應敎)를 역임하고
향리(鄕里)에 계신 늙은 어버이를 봉양(奉養)할 것을 청원하여 함양군수로 갔다가
이내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으로 제수(除授)받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옮겼다.
얼마 안되어 승정원동부승지 도승지(承政院同副承旨, 都承旨)에 이르렀으며,
호조참찬, 충청도관찰사,한성좌윤,성균관대사성,전라감사, 동지중추부사
(戶曹參判, 忠淸道觀察使, 漢城左尹, 成均館大司成, 全羅監司, 同知中樞府事)에 전임하였다가
홍치무술(弘治戊午,1498)에 명(明)나라 성절사(聖節使)로 갔다가 돌아올 무렵에
점필재 김종직의 시문집찬(詩文集撰)에 관련되어 의주(義州)로 유배(流配)되었다가
순천(順天)으로 이배(移配)되어 오래됨에 마침내 병으로 졸(卒)하니
홍치(弘治16년, 1503) 11월이라, 공(公)의 굉재박식(宏材博識)으로 문장이 가장 화려하여
당대의 문사(文士)들이 다 존경하고 지우(知遇)로 대접을 하였다.
성종(成宗)때 함양군령으로 있으면서 나라의 분부로 1개월에 한번 씩 시를 지어 올리니
그 글이 항상 임금의 포상(褒賞)을 받았다. 그 후 교체하여 임금의 측근으로 돌아와
얼마 안 되어 자주 높은 벼슬에 발탁되어 공보(公輔)에 이르더니
한번 내친 후는 마침내 돌아오지 못한 즉 애석하기 그지없다.
공(公)이 현김( 신윤범(縣監 申允範)의 따님을 취처(娶妻)했으나 무후하고 별세하였으며,
공의 여막에는 오직 신씨 부인(申氏 夫人) 혼자만이 울고 있었을 뿐이었으며,
서제 신(庶弟 伸)이 공(公)의 병이 위독(危篤)하다는 말을 듣고 달려왔으나,
이미 염습이 다 끝난 후(後)라 신씨(申氏)와 상의하여 공(公)의 생전(生前)에 정든
고향으로 관구를 모시어 명년 3월에 황간 마암동 선영(馬岩洞 先塋)옆에 안장(安葬)할새
내가 친분이 두텁다고 하여 묘표문(墓表文)을 청하여 이글을 끝으로 명(銘)을 짓노니,
명왈(銘曰),
그 바탕 백옥(白玉)같이 정결(精潔)하고 그 자태 난봉(鸞鳳)처럼 의젓하여
세상을 위하여 하늘이 내린 귀인(貴人)임을 알게 하더니
비단 같은 마음에서 금수(錦繡)같은 창잔지라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온통 구름과 무지개 휘황찬란한 것 뿐 이었지
독득오두 화국문광(獨得五斗 華國文光) 햇살 되어 뒤덮였네
서쪽으로 귀양가서 용만(龍灣)에 한숨짓고 남쪽으로 옮겨살제 순천바다 거칠어라.
마침내 변방객사 외론 넋이 되었구나. 처첩은 있지마는 자녀는 하나도 없어
어느 뉘가 상제(喪制)되어 아비라고 불러줄까? 아우가 집상(執喪)하고 벗들이 조문하니
임이야 아까워 어이할꼬? 내는 슬픔을 삼키어 이 글을 짓는다.
천추만세 광음(千秋萬歲 光陰)이 흘러가도 산과 골짜기 제아무리 깊어도
그대의 맑은 향기 어찌 감히 막으리.
홍귀달 찬 (洪貴達 撰) -명부분 후손 영환 근역(銘部分 後孫 榮煥 槿譯)
(*홍귀달은 (1438~1504)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충청도관찰사·형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그 후 경주부윤·대사성·지중추부사 겸
대제학·호조판서 등을 지내고 좌참찬이 되었다)
-위에서 부터 차례로 계문, 그 왼쪽 나무사이에 문화유씨, 아래로 매계선생, 평산신씨 묘소이다.
증이조참판휘제창묘지(贈吏曹參判諱悌昌墓誌)
祖父의 諱는 悌昌, 字는 而順이고 姓은 曺, 本貫은 昌寧이다. (중략)
顯宗 3년(1662)에 모친 申氏가 별세하자 公이 金山에 밤을 불계하고 奔喪하여 5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다가
생명까지 위험 할 뻔 하였고, 기년복(朞年服)을 마친 뒤에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갔으니,
이는 가족을 거느리고 서울 집으로 돌아오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靑陽에 당도하여 疫疾에 걸려 별세하였으니
곧 현종4년(1663) 4월 27일이었다. 그때 不肖의 先君이 겨우 15세의 나이로 밤을 불계하고 奔喪하여
그해 가을에 金山으로 運喪, 某월 某일에 黃澗의 선산아래에 안장하였다가
22년째 되는 숙종 10년(1684)에 금산 봉게리의 옛 집터 뒷산 乾坐에 이장하였고,
이듬해에 불초의 조모가 별세하자 다시 馬岩의 辛坐로 옮겨 合葬하였다.
불초의 조모 冶爐宋氏는 좌의정 諱 렴(濂)의 후예요, 諱 진?(進+日)의 따님으로 천성이 지극히 인자하여
남들과의 불화가 일체 없었고 시부모에게는 孝를, 축리(妯娌-동서들)와는 誠을 다하였으며,
홀로 된지 23년 동안 한 번도 외출한 적이 없었고 仁祖 3년에 태어나서
肅宗11년(1685) 정월 16일에 6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아! 불초의 조부와 조모의 순수한 德과 뛰어난 行은 수백년을 두고도 드문 바인데 우리 불초손들이
그 묻힌 덕행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고 있으니 유감스런 마음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그 소생은 2남 1녀로 장남은 곧 不肖의 先君인데 학행이 높아 持平에 追贈되고,
다음은 諱 述인데 文行이 一世에 알려졌으나 불우한 일생을 마쳤고, 따님은 夭死하였다.
선군의 소생은 4남 3녀로 아들은 세호(世虎), 세용(世龍), 세봉(世鳳), 세붕(世鵬)이고
딸은 채창징(蔡昌徵)에게 출가하고 둘째딸은 夭死하였다.
휘 述의 소생은 3남 4녀로 아들은 세기(世奇), 세우(世祐), 세부(世溥)이고,
딸은 鄭佶, 李東標, 李萬普, 朴胤昌에게 출가하였다.
世虎의 소생은 3남 1녀로 목운(霂澐), 곽(瀖?)이 아들이고 金處善이 사위이다.
世龍의 소생은 2남 1녀로 방(䨦), 택?(雨+澤)아들이고 金湜이 사위이다.
世鳳의 소생은 2남 1녀로 협?(雨+浹), 부(雨+溥)가 아들이고 朴東權이 사위이다.
世鵬의 소생은 1남으로 임?(雨+水+任) 이다. 世鵬의 소생은 3남 1녀로
命千, 命洪, 命五가 아들이고 徐匡漢이 사위이다.
世奇는 소생이 없으므로 涁?(雨+涁)을 後嗣로 삼았다. 世祐의 소생은 1남으로 홍(霟)이다.
世溥의 소생은 3남 2녀로 涁, 泫(雨+泫), 동(霘)이 아들이고 崔洛錫, 李熙祖가 사위이다.
鄭佶의 소생은 2남 4녀로 수호(壽 山豪), 수교(壽嶠)가 아들이고,
李遇祥, 李錫福, 金亨運, 朴思義가 사위이다.
李東標의 소생은 1남 2녀이고 李萬普의 소생은 2남 2녀이고,
朴胤昌의 소생은 1님 2녀이다. 이외에도 내외손이 모두 백명이 넘으니
이른바 조상의 두터운 은덕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不肖孫 世鵬이 삼가 쓰다
통훈대부인재공비문 역(通訓大夫認齋公碑文 譯)
公의 諱는 世龍 字는 泰如 號는 認齋 本貫은 昌寧인데 新羅時代에 諱 繼龍 封號 昌城君이 그 始祖이고
本朝에 와서 諱 偉는 세칭 梅溪先生으로 諡號는 文莊道學과 文章으로 當世에 首位가 되었으니
바로 公의 六世祖이다. 高祖 諱 胤禧는 禮賓寺正인데 壽職으로 通政大夫品階에 올랐고
曾祖의 諱는 瀷, 祖父의 諱는 悌昌이고 父親의 諱는 逾 號는 愚拙堂인데 學行으로 吏曹判書에 追贈되고
母親은 贈貞夫人 善山金氏로 護軍 震遂의 따님이다. 公은 肅宗二年(1676)四月十七日에 태어나서
英祖十一年(1735)二月十九日에 別世, 이해 四月十九日에 黃間 馬岩山 酉坐에 安葬되었으니
이는 先代의 墓가 이곳에 있는 때문이다. 公은 침착한 천성에 操行이 단정하였고
집에서는 孝友로서 先代의 遺德을 계승하였다. 더욱이 聖賢의 글을 좋아하여 손수 베끼고 외워서
그 뜻을 탐구하였고 아우인 進士 世鵬과는 道義로서 서로 講磨 형제와의 和樂이 진지하였다.
그리고 寒水齋 權先生의 門下에서 學問의 지표를 체득하였고 일생동안 言論이 구차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다 尊敬하고 복종하였다. 父親喪을 만나서는 禮制(喪禮에 관한제도)를 엄수하다가
여위어 病이 되었으나 몸에 喪服을 벗거나 반찬에 양념을 쓰지 않았고,
母親의 喪을 만나서는 연세가 六十이었으나 執喪절차를 일체 父親의 喪과 같이하여
小祥이 지나도록 고기를 들지 않았으므로 지병인 嘔逆症에다 元氣허약으로 火가 발작하여
끝내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英祖四年(1728)에 李隣佐의 역모에 관한 변란이 道內에서
일어났을 적에는 本쉬(본읍의 원)를 찾아가 대비책을 激勵(격려하여 권하는 것)하고
손수 倡義文을 지어 변란에 나설 계획을 세웠으나 모친이 年老하여
公을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므로 이를 결행하지 못하였다.
이상이 公의 일생에 가장 큰 志行이고 그 나머지는 그만 생략한다.
夫人 安東金氏는 進士 潭의 따님으로 二男一女를 두었고
長男 䨦은 冶隱의 後孫 吉重龜의 딸을 맞이하여 四男一女를 두었고,
次男 박(못 박)은 冲庵의 後孫 金世秋의 딸을 맞이하여 一男二女를 두었고,
따님은 光山金湜에게 출가하였다. 나는 進士君(世鵬)과 同門의 友誼가 있다.
하루는 進士君이 公의 行狀을 서술, 아울러 便紙를 보내어 그 墓表를 請하면서
先生의 行誼가 인멸되어 가는 것이 매우 애석하다고 하였다. 나는 본시 글재주도 졸렬하지만
세속에서 行狀이나 墓誌를 작성하는 자들이 괜히 없는 사실을 늘어놓다가
도리어 後世의 고증이 되지 못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온 나머지 公의 行狀에서
그 큰 것만을 들어 이상과 같이 서술하였다. 그럼 進士君의 서술이 절대 그 兄을 과찬한 것이 아니고
또 나의 글이 이처럼 質實하니 거의 德을 아는 이의 버림을 받지 않을 것이다.
서원 한원진 찬(西原 韓元震 撰)하다
마암재는 대항면 마암리에 있는 재실이다.
이곳 마암리에는 매계 조위 선생을 비롯한 많은 선조들이 잠들어 계신곳이다
繼門(16대조)이하 - 世龍(8대조)까지의 시제가 차례로 이루어진다
마암재상량문(馬巖齋上樑文)
일이 先代의 未遑(미처 하지 못한 것)에 관계되었으니 의당 勤幹을 더해야 하고
정성이 후손의 追遠(선대를 추모하는 것)에 깊었으니 어찌 經營을 지체 시키겠는가?
위치는 바로 黃澗縣 남쪽 也須巖아래일세. 삼가 생각 하건데,
蔚珍縣令 贈吏曹參判과 文莊公 梅溪선생 두 분 祖考府君은 일찍부터 禮法家門의 謀訓을 이어받아
蔚然히 聲明朝廷의 名이 되었으며, 占畢齋를 師門으로 추앙이 가장 높았고 一蠹(일두 정여창선생),
寒暄(한훤 김굉필선생)을 師友로, 文章은 餘事로 여겼네. 葵亭의 기문에는 愛君 憂國하는 정성이 깊었고,
淸坮의 講論에는 隆師 親友하는 道가 간절했건만 막연할사. 서토에 士論이 공정하지 못하고,
애석할사 영남에 享祀가 누락되었네. 첫머리에 수록된 弔義帝文에는 春秋의 의리 당당하건만
凶孼들이 죄를 모함하였고 魂 부르던 鵬窓(謫所)에는 그 처지 孤單한데 良朋(김굉필을 이름)이
喪事를 治送하였으니 禍가 지하에까지 미쳤어라. 어찌 甲子년(1504, 연산군 10)에 겪은
사흘 밤의 참혹을 말하겠으며 원한이 梧秋(墓木)에 깊었어라.
丙寅년(1506,중종 1)에 비로소 9년 동안의 억울함이 풀렸네. 위에는 先考妣의 墓가 모셨으니
참으로 父子가 한 곳에 돌아갔고, 아래는 자손들의 무덤이 벌려졌으니
진실로 陟降(魂靈의 오르내리는 것을 말함)하는데 서로 보호하리.
이곳은 산이 좋고 물이 곱거니 어찌 땅이 秘藏하고 하늘이 아끼겠는가?
이에 宗親이 合議되고 占辭가 大吉하므로 崇禎紀元 이후 戊子년 3월 3일 壬寅에 동서로 주추놓고
子午로 方向잡아 두어채를 기획하여 墻垣(장원)을 쌓으니 모든 工人이 技巧를 다하고
한 지방을 동원하여 공사를 계속하니 온 宗族이 독려하네. 산처럼 우러르니
어찌 후인들의 감탄이 없겠으며, 砥柱(지주)처럼 우뚝하니 걷잡을 수 없는 狂瀾을 돌이키리.
이제 松竹처럼 苞茂(포무=집터가 다복한 대나무처럼 鞏固하고 구조가 무성한 소나무처럼 우밀 하라는 뜻)하니,
거의 百世의 花樹가 敦睦하리. 이에 짤막한 노래로써 抛梁(포량-대들보 올리는 것)을 도우니,
丘園이 輔弼을 맡고, 초목이 英靈을 發揚하네. 어이여차 대들보, 東으로 향하니 전면 긴 시내에 광풍이 떴구나.
民居는 稀少하고 찬 샘물 맑은데, 산 우뚝하고 鳳 날으니 바위가 비지 않았네. 어이여차 대들보,
西로 향하니 嶺湖(경상도와 충청도)의 십리계곡 바라 뵈누나!
해마다 한 차례씩 歲享 드릴 적에는 신이 내리는 복 받을 齋室 없이 한이 없네.
어이여차 대들보 南으로 향하니, 이제야 也須巖 아래 우뚝 섰네.
백년이후 처음 經營된 바이라. 감히 先代의 미처 못 한 바이라 하겠구나.
어이여차 대들보 北으로 향하니, 輪奠(윤전-건물이 장대하고 아름다운 모양)하여 꿩이 나는 듯하네,
氷梅와 雪菊이 햇빛을 향해 피었는데, 蔥龍(총룡-맑고 푸른빛의 표현)한 산 빛이 물빛과 하나일세.
어이여차 대들보 위로 향하니, 光明한 道義를 어느 누가 표현할까? 삼가 先代의 遺業 고수하니,
그 뿌리에 枝葉이 무성한줄 알겠네. 어이여차 대들보 아래로 향하니, 먼 산 달밤에 거문고 소리 흘러오네,
沂水의 봄바람 천여년의 일 (기수에서 몸 씻고 무우에서 바람 쏘인다는 曾點의 故事)
똑 같은 淸趣 어느 누가 묘사하랴. 삼가 上樑한 이후로 和風이 날로 확산되고
先業이 墜廢(추폐)되지 않아서 蘋蘩(빈번-제물을 뜻함)을 마련하여 千秋에 享祀를 끊이지 말고
絃誦(현송-工夫를 뜻함)이 끊임없이 一堂의 科甲이 서로 이어지며,
물고기 뛰고 솔개 날듯, 선생의 至理 드러나고 구름일고 비 내리듯 조상의 流芳
그지없는가 하면, 마치 건물에 壁 바르고 지붕 덮듯이 저마다 그 德 닦기를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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