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룡폭포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성철 스님의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했던 그 글은 700년 전 중국에서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란 책을 다섯 분의 큰스님이 금강경을 해설하여 발간했는데 그 책 속에 ‘산시산(山是山) 수시수(水是水)
불재하처(佛在何處)’(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부처님이 어디에 계시 단 말인가)라는 야보(冶父) 스님의
시구가 있는데, 그 앞 구절을 인용하신 것이었단다. 산과 물에 대한 사람의 인식은 세 단계로 발전한다.
첫 번째 단계는 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즉 자연현상을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단계다.
두 번째 단계는 부처님을 만나면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된다. 만물의 근본이 하나이므로
산과 물의 구별이 사라진다.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이다. 천지(天地), 미추(美醜), 주야(晝夜), 희비(喜悲)가
모두 분리되지 않는 하나다. 이를테면 기존 가치체계에 일대 전도현상이 일어나는 단계다.
그다음 마지막 단계는 산이 도로 산이 되고 물도 다시 물이 되는, 전도되었던 가치체계가 제자리를 찾는다.
이것은 첫 번째 단계로의 회귀가 아니다. 첫 번째 단계의 산과 물이 단순한 감각적 인식 대상이라면,
마지막 단계의 산과 물은 불성(佛性)을 반영하는 도구다.
이 단계에서 불자(佛子)는 산과 물속에서, 다시 말해 천지사방에서 부처님의 불법(佛法)을 듣게 된다.
그래서 야보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부처님은 어디에 계시 단 말인가’ 반문했고, 성철 스님은
그 구절을 인용하여 법당 안에서만 부처님을 찾는 불자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신 것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견성(見性)이라 한다. 일체만물의 근본이 무엇임을 보고 알았다는 뜻이다. 견성에는 법열(法悅),
곧 깨달음으로 인한 기쁨이 수반된다.
주머니가 비어도 즐겁고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는 기쁨이다. 그러나 불교는 이때를 가장 위험한 시기로 여긴다. 그 시기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모든 가치체계에 일대 전도현상이 일어난 두 번째 단계인 탓이다.
겨우 입문했을 뿐인데도 스스로 완성된 존재라 착각하고, 누가 더 큰 도를 깨쳤는지 경쟁하고, 부처님의
자비를 말하면서도 누구보다 독선적일 때가 바로 이 시기다. 그래서 견성은 오도(悟道)의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
오도는 다시 산은 산이 되고 물은 물이 되는 단계, 즉 전도되었던 가치체계가 제자리를 찾는 마지막 단계다.
언제나 천지사방에 충만한 불성을 힘입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하는 단계로서, 이때는 남정네가
장작 패고 아낙네가 물 긷는 것도 구도의 행위다. 그때부터 불자는 참된 의미의 불자가 된다.
결국 성철 스님께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고 하신 것은, 참된 불자 됨의 여부는 법당을 떠나 자기 삶의
현장에서 판가름 난다는 의미였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관 역시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세 단계로 발전한다.
100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의 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