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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昌寧曺門의 뿌리

창녕조씨 시조 탄생 설화와 득성 유래

by 안천 조각환 2009. 4. 22.

우리 조씨의 본관인 창녕은 원래 가락국(駕洛國)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신라에 병합된 후, 비자화군(比自火郡) 또는 비사벌(比斯伐)이라고 불리어 왔다.

신라 제24대 진흥왕 16년(555)에 하주(下州)라 일컬었다가, 제35대 경덕왕 때에

화왕군(火旺郡)으로 개칭하였는데, 고려 태조가 지금의 이름인 창녕(昌寧)으로 고쳤다.

이 밖에 창산(昌山), 창성(昌城), 하산(夏山), 하성(夏城)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진 적도 있다.

 

화왕산 일출

 

화왕산 정상의 산성과 분지 전경

 

화왕산에서 보는 창녕

 

창녕군은 중부 경남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은 대구 달성군, 동쪽은 경남 밀양군, 남쪽은 함안군, 서쪽은 합천군과 접하고 있다.

낙동강의 중류가 창녕군의 서쪽을 흐르고 있어 그 유역에 평야가 발달하여

농산물이 풍부하며 우리나라 양파재배의 시배지이기도 하다.

마산과 대구를 연결하는 국도와 고속도로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의 중심지이다.
시조가 태어나신 용지가 있는 화왕산은 창녕읍 옥전리에 있는 주산(主山)으로

산 정상에는 넓은 평원이 있으며 가야 시대에 쌓은 석성이 있었는데,

옛날에는 석축이 무려 2983척(약 10 km)이나 되는 큰 산성이 있었으나 대부분 무너지고

남쪽에 일부만 남아 있던것을 최근에 복원하여 2.7km 정도의 형태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사적 제64호로 보호되고 있다.

 

산성과 용지 원경

 

정상에는 9개의 못과 3개의 샘이 있었는데 가운데 못이 가장 크며 이것이 바로 용지이다.

세월이 흘러 차츰 매몰되고 황폐하여 형체조차 없어지는 것 같더니

1958년 초에 호남에 사는 종인(宗人) 병의(秉儀) 씨가 막대한 사재(私財)를 들여

2년에 걸친 공사 끝에 3개의 못을 개수하여 완축(完築)하였다.

1990년 초에는 창녕조씨 대종회에서 다시 못을 개수하고 못 주위에 철책을 둘렀다.

 

화왕산 서문쪽

 

화왕산 정상과 창녕

 

동문쪽 산성

 

동문쪽에서 조금 내려오면 만나는 창녕조씨 득성지지

 

이 비는 당시 경상도 관찰사(慶尙道 官察使)이던 조시영(曺始永,1843~1912)이

1897년(광무원년, 정유 丁酉), 창녕조씨 시조 태사공 조계룡(曺繼龍)을 낳게한

화왕산정 용지(龍池) 동쪽인 산성 동문(東門) 근처 자연석(2.5×1,46m)에

170cm×56cm의 구획을 정해 다듬어내고 그 안에 

창녕조씨득성지지(昌寧曺氏 得姓之地)라 음각하여 세웠다.

 사적 제64호인 화왕산성 안에 있는 이 비(碑)는

경상남도 문화재 제246호 지정(2003.04.17), 창녕군 향토문화재 제14호이다.

 

창녕조씨득성지지(昌寧曺氏得姓之地)

 

창녕조씨 시조 탄생 설화와 득성 유래


경남 창녕군 창녕읍의 화왕산(火旺山) 정상에 세 개의 연못과 아홉 개의 샘이 있다.

신라 제26대 진평왕(529 - 632) 때의 일이다.

경주이씨 한림학사 이광옥(李光玉)의 집안에 예향(禮香)이라는 딸이 있었다.

미모가 아름답고 범절이 특출하였으나 어려서부터 병이 있어 고생하고 있었다.

당시의 명의를 찾아 병을 고치려고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여

온 집안이 근심과 절망에 싸여 있었다.

 

창녕조씨 시조 탄생설화가 깃든 창녕 화왕산(火旺山) 용지(龍池)

 

그런데 하루는 어떤 선인이 찾아와 말하기를 "창녕에는 화왕산이 있고

화왕산에는 신령스런 연못이 있는데 옛부터 영험이 있기로 이름이 있습니다.

그 연못에 가서 목욕을 하고 성심으로 기도하면 병이 완쾌될 것이요."라고 말하였다.

이광옥의 집안에서는 그의 말을 좇아 길일을 택하여 그 연못에 가서

목욕을 하고 기도를 올리게 하였다.

 

용지동천(龍池洞天)

 

예향이 그 연못에 가서 목욕을 하고 성심으로 기도를 하는데,

별안간 못 주위로부터 앞을 가릴 수 없이 안개가 자욱하여 오고갈 길을 잃었다.

얼마 후 안개가 거치고 정신을 차려보니 예향이 연못에서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화왕산에서 돌아온 예향은 병이 씻은 듯이 완쾌되었는데, 태기가 있어 남자아기를 낳았다.

그 아이는 미모가 수려하고 총명하였으며, 겨드랑 밑에 조(曺)자가 뚜렷이 쓰여 있었다.

 

화왕산 남쪽 절벽

 

그리고 하룻밤 꿈에 한 장부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화왕산 연못의 용의 아들로 이름을 옥결(玉訣)이며 그대가 낳은 아이의 아버지이다.

아이를 잘 기르면 후에 공후(公候: 한 지방을 맡아 다스리는 제후)가 될 것이며,

그렇지 못한다 하여도 경상(卿相 : 조선시대 판서, 지금의 장관)은 될 것이며,

자손이 만세토록 번성할 것이다." 하고는 사라졌다.

 

산성 남쪽에서 보는 서쪽 절벽

 

예향은 너무나 특이한지라 이 사실을 그의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고했다.

한림학사 이광옥이 이 사실을 진평왕에게 아뢰니

임금이 겨드랑 밑에 있는 조(曺)자로 성을 하사하고,

용의 아들이라 계룡(繼龍)이라 이름하니 이분이 바로 창녕조씨의 시조이다.

 

우포늪에서 보는 화왕산

 

시조 조계룡(曺繼龍, 571-651)의 행적

 

조계룡은 장성하여 진평왕의 부마(駙馬:임금의 사위)가 되었고,

한번은 동래에 왜구가 침범해 왔을 때 진격해 들어가니,

왜구들이 "조공(曺公)은 천인(天人)이시다." 하고는 스스로 군사를 거두어 물러갔다.

벼슬이 태사(太師)에 올라 왕실의 스승이 되었으며,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시조 조계룡은 신라 진평왕의 사위인 부마이다

 

창녕조씨 시조 태사공 조계룡(曺繼龍)의 묘소

 

공주의 남편으로 부마도위가 되셨으며, 보국대장군, 상주국대도독을 역임하셨고,

태자태사이셨고, 금자광록대부를 지내셨으며, 창성부원군에 봉해지셨다.

진덕여왕 5년 신해년인 서기 651년에 돌아가시니

연세가 81세(571-651)이셨고 시호는 문의이시다.

묘는 경주시 안강읍 노당 2리 자옥산 아래 초제의 신좌에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