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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昌寧曺門의 뿌리

창녕조씨 시조 재실 종덕재와 기문

by 안천 조각환 2009. 4. 22.

창녕조씨 시조인 태사공 조계룡(曺繼龍)묘소는

경북 경주시 안강읍 노당2리(초제)에 있으며, 바로 아래에는

시조의 묘소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하여 지어진 종덕재(種德齋)가 있다.

 

종덕재 전경

 

이 건물은 조선 영조 33년(1757년)에 처음 건립하였다가

1798년(무오년)에 중수하고, 1832년(임진년)에 크게 중수 하였는데

이 때에 건립과정과 의의를 상세히 기록한 내용이 바로 종덕재기(種德齋記)이다.

종덕재기를 쓴 조봉진(鳳振, 1777~1838)은 1802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한성부윤, 공조판서, 대사간, 이조판서, 숭록대부 세자시강원 사서 등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조선후기의 선비이다.

 

영사문(永思門)

 

종덕재기(種德齋記)

경주자옥산(慶州紫玉山) 아래 초제동에 우리선조인 신라태사공의 묘가 있었는데

역대(歷代)가 누차 바뀌는 사이에 그만 실전(失傳)되었다가

지난번 삼종조인 담운공 휘 명교(諱 命敎)께서 자나 깨나 성력(誠力)을 기울여

묘를 찾아내었고 우리 선군이 계속해서 선대의 일을 주관,

무오(1798)년에 팔도의 여러 종족과 협의하여 묘 앞에 단을 모아 해마다 제사를 드렸고

병자년 봄에 소자가 동래부사(東來府使)로 부임하여 돌을 세워 그 顚末을 기록하였으니,

이는 선군이 다하지 못한 유지를 받들기 위함이었다.

 

종덕재 정당(種德齋 正堂)

 

묘 옆에 있던 묘재(墓齋)역시 무오년에 건립된 것인데

오랜 세월에 이어 퇴폐되었으므로 종인들이 나를 찾아와서 사실을 말하였다.

내가 마침 호남(湖南)을 안무(按撫)하고 있던 터이라

여러 자손들과 약간의 자금을 갹출하여 중수할 경비를 마련하고

종인 석오(錫五)가 공사를 감독한바 임진년에 묘재가 다시 완성되었다.

 

동재

 

이에 나에게 재명(齋名)을 짖고 또 기(記)를 쓰기를 청함으로

내가 사양할 수 없어 재명을 종덕(種德, 덕을 심는다는 뜻)이라 하였으니,

옛적에 묘재를 건립하는 이가 의례히 재명을 보고 의의(意義)를 생각할 만한 것으로

이름 하였으니, 이는 그 조상에게 충실하고자 함이다.

그 조상에게 충실하고자 하면서 덕을 심는데 충실하지 않는다면,

어찌 옳다하겠는가? 그래서 내가 종덕(種德)으로 이름 한 것이다.

 

서재

 

아! 우리 조상이 심어 놓은 덕은 너무도 많다.

지금까지 천여년 동안 자손들이 그 덕을 한 없이 누리어

혹(或)은 고차사마(高車駟馬)를 탄 듯 그 몸을 귀하고 영광되게 하기도하고,

혹은 많은 전토를 소유한 부로 그 가산(家産)이 윤택(潤澤)하기도 하고,

혹은 장수(長壽)와 강녕(康寧)에다 자손이 번창(繁昌)하기도 하였으며,

이에서 뒤진이도 배고프면 먹을 수 있고,

추우면 입을 수 있어 구학(溝壑)에 뒹구는 고난이 없었으니, 이는 모두

우리 조상이 심어놓은 덕으로서 이다. 이를 어찌 잠시인들 잊을 수 있겠는가?

 

반고당(反古堂)

 

이를 잠시도 잊지 않는다면 조상에게 충실함으로서

그만한 보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조상에게 충실함으로서 그만한 보답이 있는 것이고 보면

역시 덕을 심는 일밖에 없을 뿐이다.

왜냐하면 지금 누가 여기에 곡식을 심어 놓았을 때

그 자손이 거두어 먹기만 하고 이어서 심지 않는다면,

어찌 쉬 고갈되거나 황폐되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그런 조상을 같이한 우리 자손들이, 조상이 심어놓은 덕을 이어서

심고 누리고 또 누리고 심어서 끊임이 없다면

우리 조상의 묘와 우리 조상의 제사도 천지(天地)와 같이 끊임없게 될 것이니,

보답을 받는 길이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아! 앞으로 이 재(齋)에 들어온 이가 어찌 이를 서로 근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적에 소자첨(蘇子瞻)이 남의 종덕정(種德亭)에 제(題)하면서

“나무를 심는 것이 종을 심는 것만 못하다.

 

 

사람의 취산(聚散)은 마치 날아다니는 새들과 같다” 하였으니,

이는 덕을 심는다는 명칭만 내세우고 덕을 심는 실속이 없어

스스로 침체부진한데 이르게 되는 것을 풍자한 말이다.

그러므로 조상을 같이한 우리 자손이 능히 차첨의 풍자한바가

되지 않는다면 참으로 큰 다행일까 한다. 고 기록한다.

 

종덕재 앞 광장

 

후손 한림규장각 교리수찬 집의낙정 겸 필선 통정대부좌부승지

대사간 이조판서 병참 동의금총관 부제학지성균관사 공참 예참 숭록대부

세자시강원사서 좌빈객 좌찬성 봉진이 삼가 쓴다.

(後孫 翰林奎章閣 校理修撰 執義樂正 兼 弼善 通政大夫左副承旨

大司諫 吏曹判書 兵參 同義禁摠管 副提學知成均館事 工參 禮參 崇祿大夫

世子侍講院司書 左賓客 左贊成 鳳振 撰)

 

종덕재와 시조 묘소 입구 표지석

 

시조 태사공 묘소 입구

 

시조 태사공 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