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조씨는 한때(주로 조선 중기) 조자를 두 획을 그은 조(曹)자로도 썼다.
그러나 조선말 정조때(1800년) 임금의 교지가 내린 이래로 한 획으로 통일하여 쓰고 있다.
그 경위를 문헌 자료에 있는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정조 24년(1800년) 4월 13일 묘시 임금님께서 말씀하셨다.
"승지(承旨 : 당시에 동부승지 벼슬을 하고 있는 曺錫中을 일컬음)의
성(姓)인 '曺'자는 혹은 '曹'라고도 쓰는데,
획이 하나 있는 것과 둘이 있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승지의 선대(先代)는 모두 한 획을 써 왔다던데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석중이 대답하였다. "신의 시조가 탄생할 때에 겨드랑이에 무늬가 있었는데,
무늬인즉 '曺'자로서 획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라 조정에서는 그로 인해 '曺'자로 성을 내렸습니다.
신의 선대는 모두 한 획을 따랐으며,
선대의 비갈(碑喝:묘비 등 일체의 비석)에 새겨진 바도 또한 그러했습니다.
신의 집안 보첩(譜牒: 족보)에도 다 그렇게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신의 6대조인 한영(漢英)께서 운서(韻書:한자를 운에 따라
분류한 한자음 사전)에 좇아 모두 두 획을 따르도록
8도에 있는 각 종중(宗中)에 통문을 보내어 이로부터 두 획을 쓰게 되었습니다.
임금이 말씀하셨다.
"두 획을 따른 것은 불과 6대조 이후의 일이고, 한 획을 따른 것은 천 년이나 오래된 일이다.
지금부터 옛것을 회복하여 다시 한 획을 따르는 것이 옳겠다.
서(徐) 씨 성은 인(人)자에 미(未)자가 따르는 글자였으나
근자에 와서 모두 인미(人未 : '사람이 아니다'라는 뜻)가 됨을 싫어하여
모두 미(未)자에서 그 위의 획을 제거하여 쓰고 있다.
그러나 이는 위의 획을 제거하여 쓰는 것이 심히 왜곡된 혐오(嫌惡)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이 전교(傳敎:임금이 내린 명령) 중에 인미를 따르도록 하교(下敎)하였다.
그 후에 서씨들은 모두 이를 준수하여 행하였다."
오늘 탑교(榻敎 : 의정부에서 명령을 내림) 중에 도승지(都承旨 : 새로 도승지가 된
曺允大를 일컬음)의 성(姓)자를 한 획을 써서 내려 주도록 하니 이에 따라 시행되었다.
또한 경연(經筵:임금 앞에서 책을 읽고 토론하던 자리) 때도 말씀하시기를,
"이 사실을 승정원일기에 상세히 기록하여 좇아서 쓰게 하되 참고가 되게 함이 좋겠다."
인하여 탑교를 쓰도록 명하여 가로되,
"새로 제수(除授)한 도승지 조윤대를 패초(牌招 : 왕명으로 승지가 신하를 부름)하여 살펴서 맡겨라."
하시고는 이에 물러가라 명하니, 승지, 사관들이 차례로 물러갔다.
정조 24년(1800년) 4월 13일 오시 임금님께서 말씀하셨다.
"도승지의 성(姓)자에 한획을 감한 것을 경(卿 : 검교직제학 벼슬인 李晩秀를 가리킴)은 들었느냐?
본시 한 획이었는데 공공연히 8도에 통문을 돌려 조(曺)자 위에 한획을 더하였다는구나.
그러므로 오늘 도승지를 패초하여 전교를 내릴 적에 한 획으로 曺자를 써도록 했으니
그 조씨에 있어서 가히 중시조라 일컬을 수 있겠도다." 만수가 말하였다.
"신도 또한 조씨 성의 본자(本字)는 한 획이라고 들었습니다."
정조 24년(1800년) 4월 14일 진시 임금이 중희당(重熙堂)에 납시고
도승지 조윤대가 입시(入侍)할 때에 행(行) 도승지 조윤대, 가주서(假注書) 윤정렬(尹鼎烈),
기주관(記注官) 김계렴(金啓濂), 기사관(記事官) 이존수(李存秀)가 차례로 나아가 엎드렸다.
임금이 윤대를 가리켜 말했다.
"어제 경의 집안 성의 글자 자획에 관한 일로 말을 주고받았는데 마땅히 들어 알고 있겠지.
무슨 연고로 한 획을 더하였느냐?"
윤대가 말하였다. "왕희지(王羲之)의 필진도(筆陳圖)에도 한 획으로 쓰여 있고
또 신의 선세(先世)도 한 획을 써 온 지 오래됩니다.
신의 선조 한영(漢英)이 통문을 돌려 고쳐 쓰게 하니 이에 따라 두 획을 쓰게 되었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옛날을 따르는 것이 무방하다. 하물며 뜻에도 어그러짐이 없음에 있어서랴."
윤대가 말하였다. "신의 5대조 이상의 비갈(碑喝)은 모두 한 획으로 쓰여 있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조윤형(曺允亨)이 세상이 살아 있지 않음이 심히 유감스럽도다. 그 사람은 글마다 두 획을 썼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들리기로는 한 획을 쓰고자 하였다더구나.
지난날 조석정(曺錫正)이 과거에 등용되었을 때 이직제학(二直提學)이
한 획만 쓰는 고로 그 까닭을 물으니 조씨의 의향이 한획을 쓰기를 바란다고 하더구나.
그러니 탑중(탑中 :神主)에 쓰여 있는 바는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조윤형은 작고한 지 오래되지 않으니 탑중의 유서도 한 획일 것이다.
서씨(徐氏) 집안일을 보건대, 약봉(藥峯 : 서씨 중의 한 분) 이후로 모두 여(余)자를 사용했으니
중간에 인미(人未)를 꺼려하여 글자의 획을 변용한 것이다.
그로 인해 특별히 교지를 내려 전에 쓰던 대로 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그 이후로 번성하기를 극에 달하였다."
윤대가 말하였다. "특별히 통문을 돌려 고치고자 합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경연(經筵)에서 말한 것을 어떻게 구성해 낼 것인가. 동부승지로 하여금 들어오게 하라."
천신(賤臣)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나아가 전하고
동부승지 조석중(曺錫中)과 함께 같이 들어와 나아가 엎드렸다. 석중이 아뢰었다.
'어제 경연에서 말한 것을 초안한 것은 주서(注書)가 교체되어 갈 때 가지고 갔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고친 후에 들여오는 것이 좋겠다."
정조대왕 영정
2.한 획 따르기 통고문(從一劃通告文)
서경(書經)에 `석토성'(錫土姓 : 땅이름에 따라 성을 내린다.)이라 하였으니
석(錫)이라는 것은 천자(天子)가 내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성을 얻음은
신라, 고려 이래로 임금의 명령으로 얻음이 많았는데 우리 조씨 또한 그러하였다.
이제 우리 임금의 특명으로 글자의 획수를 줄여 옛 모양을 따르도록 한 것은 또다른 특별한 은혜이다.
무릇 우리 시조께서 탄생하실 제 신령스레 기이함이 나타나 옆구리에 `曺'자 무늬가 있었으니
신라 진평왕이 그 기이함을 듣고서 그로써 성을 삼도록 명하셨다.
그 후로 천여 년을 `曺'자로 성을 삼아 시행해 오다가
나의 7대조 설정공(雪汀公 : 曺文秀)께서
운서(韻書)에 실린 바에 따라 한 획을 더하여 `曹'자를 이루어 시행해 온 지 이백 년이 가깝다.
경신년(庚申年 : 1800년) 4월 13일 내가 승지(承旨)가 되어 경연 (經筵)에 나아갔더니
임금님께서 말 끝에 우리 성씨의 내력에 대해 물으시매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임금님께서는
"시행해 온 지가 오래되고 가까이되고 함이 있을 때는 오래됨을 따름이 마땅하다.
하물며 시조의 옆구리에 기이함이 나타나
그 당시의 임금이 그로써 성을 삼으라고 명령을 했음에 있어서랴."라고 하셨다.
이에 신(臣) 윤대(允大)를 도승지로 명함에 있어서 교지를 내리시기를,
"먼저 도승지 임명하는 교지에서부터 한 획을 줄여 써서 반포할 것이며
또한 오늘 경연에서 하교한 것을 승정원 일기에 기재하되 훗날 참고가 되게 글을 지어라." 라고 하셨다.
천신(賤臣)이 임금의 명을 받들고서 물러나와 가만히 엎드려 생각해 보니
진(晉)나라의 왕희지(王羲之)는 서법에 밝으나
난정첩(蘭亭帖)에 조희(曺喜)의 조(曺)자는 이미 한헉을 줄여서 썼고,
한(漢)나라의 {석경(石經)}은 경서의 고본인데 자전의 주석을 살펴보면 `
曹'자는 {석경}에 의해 모두 `曺'자를 따른다고 되어 있었다.
이로 보건대 `曺'자의 글자 됨됨이는 옛날부터 그러함을 알 수 있다.
우리 선조들 가운데서 획을 하나 더한 것은 대개 글자의 뜻이 같음으로써
오늘날의 글자 모양을 따른 게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 우리 임금님께서 획을 하나 줄이라고 명하신 것은 실로 옛것이 귀중함을 존중하였기 때믄이다.
비록 그 획은 하나 줄었으나 글자의 뜻은 다름이 없다.
이는 속절(束哲)의 본래 성이 소(疎)였으나 족(足)자를 제거하여 속(束)이 된 것과
문로(文潞)공의 본래 성이 경(敬)이나 구(苟)자를 제거하여 문(文)자가 된 것과는 다르다.
드디어 위의 사실로써 팔도의 여러 종친들에게 고하면서 한가지 덧붙여 말하노라.
`曹'자는 서쪽해〔西日]의 형상이 있는데 서쪽해는 쉽게 쇠하는 것이고,
`曺'자는 동쪽해〔東日〕의 형상이 있는데
동쪽해는 바야흐로 오르고 오르는 뜻이 있으며 유구하고 무궁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들이 임금을 칭송할 때에 해가 떠오르는 것 같다고 하였다.
무릇 '曺'자로 성을 삼은 사람들은 우리 임금이 명한 바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니라.
그리고 위로는 하늘이 보호하는 바에 보답할 것이며,
아래로는 유구무궁한 뜻으로 후손을 위하여 빌어 보세.
정조 24년(1800년) 5월 1일
창녕후인 조석중(曺錫中)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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