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대구 매일신문사에서 경북도내 각 문중이야기를 다루면서
"김천의 문중이야기 <5> 창녕 조씨~매계(梅溪) 조위(曺衛)" 라는
제목으로 2015년 6월 16일 게재되었던 내용을 옮긴것이다.
조선 성종 총애 '궐내 스캔들'도 용서받은 신진사류 대문장가
봉계에 위치한 율수재는 조위가 살던 옛집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구거)이다.
율수재에서는 1980년부터 김천문화원이 주최하는 매계백일장이 열린다.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천상(天上) 백옥경(白玉京) 십이루(十二樓) 어디 매오/
오색운(五色雲) 깊은 곳에 자청전(紫淸殿)이 가렸으니…
옥황(玉皇) 향안전(香案前)의 지척(咫尺)에 나아 앉아/
흉중(胸中)에 쌓인 말씀 쓸커시 사뢰리라…'
조위가 지은 유배 가사의 효시로 알려진 '만분가' 일부다.
무오사화로 유배 중이던 조위는 성종에 대한 그리움을 '만분가'에 담았다.
조위와 성종 사이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그는 이처럼 선왕을 그리워했을까?
무오`갑자사화로 인해 유배되고, 죽어서도 부관참시라는
극형을 당했던 조위, 이번 호에는 성종이 아꼈던 선비이자
영남 신진사류의 대문장가였던 조위의 삶을 따라가 보자.
◆성종 임금이 가장 아낀 신하 조위
성종 임금은 조위를 총애해 "백관 중 문예는 매계가 단연 으뜸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한다.
서유영(徐有英)이 1873년(고종 10년)에 저술한 문헌 설화집 금계필담(錦溪筆談)에는
성종이 조위를 아껴 궁녀와의 관계를 묵인하고 중매를 선 사연이 기록돼 있다.
정사가 아닌 야사이지만 성종이 조위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 드라마를 보면 궁녀가 외간남자와 사랑하고 그 사랑이 이뤄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강채윤(장혁 분)과 궁녀 소이(신세경 분),
MBC '대장금'에서 군관 서천수(박찬환 분)와 장금이 어머니인 궁녀 박 씨(김혜선 분),
또 판관 민정호(지진호 분)는 궁녀 장금이를 사랑한다.
드라마 속의 이런 사랑이 조선 시대에 가능했을까? 정답은 '아니다'이다.
조선시대 법전들 '수교집록', '속대전', '대전회통' 등에서는 '궁녀가
바깥사람과 간통하면 남녀 모두 즉각적으로 참형을 가한다'고 규정돼 있다.
궁녀가 바깥사람과 사랑했다가 참형을 당한 사건은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기록돼 있다.
성종은 이처럼 엄한 법도를 무시하고 조위와 궁녀 간의 관계를 묵인하고 중매를 서기까지 했다.
성종이 어느 날 내시 한 명만 데리고 홍문관(서적`문서 관리기구)을 시찰하다가
숙직 중인 조위가 책을 읽고 있던 방의 뒷문을 열고 들어가는 궁녀를 목격한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성종은 체면을 버리고 문틈으로 이들을 들여다봤다.
조위를 사모하던 궁녀는 "평소 선비님을 연모해 왔다"며 마음을 표현했지만,
조위는 "궁궐의 법도가 지엄하니 어서 방에서 나가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위에게 버림받았다 여긴 궁녀는 은장도를 꺼내 자살을 시도한다.
조위는 이를 말리려 궁녀를 끌어안았고 둘은 엎치락뒤치락하다
촛불을 꺼뜨렸고 두 남녀는 결국 함께 잠자리를 했다.
이 광경을 몰래 지켜보던 성종은 이들이 잠들자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덮어 줬다.
다음 날 아침, 임금의 겉옷을 보고 사정을 짐작한 조위가 스스로 벌을 청하자
그를 아끼던 성종은 "나 혼자만 아는 일"이라며 덮어두려 했다.
하지만 전날 밤의 일을 조위와 문장을 겨루던 삼괴당 신종호도 목격했고
성종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조위와 친분으로 고민하던 신종호는 고민 끝에 이 일을 임금에게 보고하며
조위를 엄하게 벌하라고 청했다.
그러나 유능한 선비를 잃기 싫었던 성종은 신종호를 평안도 암행어사로 파견하며
"평안도에는 미인이 많으니, 여인을 가까이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다.
신종호가 떠난 뒤, 성종은 평안도 관찰사에게 "어떻게 하든 신종호와 평양 기생을 붙여주라"는
비밀지령을 내렸다. 이에 관찰사는 옥매향이란 관기를 불러 신종호를 유혹하라 명했다.
평안도에 들어선 신종호는 어사의 임무에만 충실할 뿐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옥매향은 신종호를 유혹하기 위해 꾀를 냈다.
어사의 임무를 수행하며 성천 고을에 도착한 신종호는 한밤중에 들려오는 여인의
울음소리에 잠에서 깼다. 울음소리를 따라나선 그는 소복을 입은 미모의 여인을 발견했다.
사연을 물으니 사랑했던 남편이 죽어 따라 죽겠다는 것.
신종호는 여인에게 목숨을 아끼라며 부채를 주고 다음에 데리러 올 것을 약속했다.
여인은 믿음을 달라며 함께 밤을 지내자고 했고 신종호는 이를 받아들였다.
어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신종호는 성종에게 명을 어겼음을 고하고 죄를 청했다.
성종은 "사람이 살다 보면 어찌 실수가 없을 수 있겠느냐"며
"지난번 조위가 궁녀와 함께 밤을 지낸 것도 이와 같은 것"이라고 신종호의 입을 막았다.
성종은 조위와 신종호의 죄를 덮고 이들에게 각각 살림을 차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금계필담에 실린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성종이 조위를 지극히 아꼈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조위는 이 외에도 1475년 부산을 유람하다 한림연(翰林宴)에서
금지된 고기와 기생`악공들이 곡을 연주한 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살고있던
김산군에 부처(付處`벼슬아치에게 어느 한 곳을 지정해 머물게 하던 형벌)된 바 있다.
1487년에는 집에다 외읍의 기녀를 두고 서첩으로 삼은 죄로 추고를
받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기록들을 고려하면 조위는 문장뿐만 아니라
풍류도 즐겼던 선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오`갑자사화로 유배되고 죽어서도 부관참시당한 말년
임금의 이런 총애를 받던 조위도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등극하자
무오사화(戊午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를 거치면서 인척이었던 점필재
김종직`봉계 창녕 조씨 문중과 함께 어려움을 겪는다.
조위는 1495년(연산군 원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며 점필재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록에 수록해 무오사화에 휩쓸린다.
1498년(연산군 4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를 다녀오던 조위에게
연산군은 성종실록에 조의제문을 원문 그대로 수록한 점을 들어 압록강을
건너면 즉시 참하라는 왕명을 하달했다.
역관으로 동행한 이복동생 조신(曺伸)이 압록강을 건너기 전 소식을 접하고
답답한 마음에 요동 땅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추원결(鄒元潔)이라는 점쟁이를 찾아
점을 쳤는데 점쟁이는 '천층낭리번신출, 야수암하숙삼소'(千層浪裡飜身出, 也須岩下宿三宵`
천길 물결 속에서 몸이 뒤집혀 나오고, 바위 아래서 3일간 잠들기를 기다린다)라는
점괘만 적어주고는 더는 말이 없었다. 첫 구절은 위기를 탈출할 수 있다고 해석이 되지만
둘째 구절은 도무지 짐작되는 바 없었다.
조위는 압록강을 건너자 바로 체포돼 형장으로 끌려갔으나
당시 재상 이극균(李克均)이 나서 목숨을 걸고 "매계 조위는 선왕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신하였으니 처형함은 도리가 아니다"고 해
점괘의 첫 구절처럼 겨우 목숨을 건져 의주로 유배됐다.
전남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긴 후 병을 얻어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조위가 세상을 떠나며 점괘의 둘째 구절
'也須岩下宿三宵'(모름지기 바위 밑에서 3일을 기다린다)는 영원히 잊힐 듯했다.
그러나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연산군은 조위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시신을 흩어 놓아 사흘 동안 수습하지 못하게 했다.
이때서야 점쟁이가 써준 점괘의 둘째 구절이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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