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대구 매일신문사에서 경북도내 각 문중이야기를 다루면서
"김천(金泉)의 문중(門中) 이야기 (4) 창녕조씨~봉황부유형의 명당"
이라는 제목으로 2015년 6월 9일 게재되었던 내용을 옮긴것이다.
묏자리 물 채워 양보 받은 명당
창녕 조씨 현침혈 명당 옹달샘. 현침
김천의 문중이야기에서 두 번째로 다룰 곳은 창녕 조씨(昌寧 曺氏) 문중이다.
창녕 조씨가 누대에 걸쳐 살아오고 있는 봉산면 인의리(상리)는
예지리(중리)와 신리(하리)를 포함해 '봉계'(鳳溪)라고 불린다.
봉계에는 창녕 조씨뿐만 아니라 서산 정씨와 영일 정씨가 함께 집성촌을 이뤄 살았다.
봉계는 봉황이 물 위에 떠 있는 봉황부유형(鳳凰浮遊形)의 명당으로 불린다.
창녕 조씨 입향조 조심(曺深)이 김천으로 입향한 것은
서산 정씨 정윤홍(鄭允弘)의 사위였던 인연으로 전해진다.
고려 말 군기부정(軍器副正)을 지냈던 정윤홍은 고려의 국운이 다함을 한탄하며
다섯 아들을 거느리고 1373년(공민왕 22) 김천 봉산면 봉계로 은거해 자리를 잡았다.
당시 정윤홍의 둘째 딸은 개경에 살던 조경수의 3남 조심에게 시집을 갔다.
조경수(曺敬修)는 고려 말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을 단행해
창왕을 옹립한 공으로 좌시중에 오른 조민수(曺敏修`?~1390)의 동생이다.
1389년에 조민수가 조준의 탄핵으로 창녕으로 유배되면서 정권으로부터 소외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개경에 살았던 조경수의 3남인 조심도 벼슬을 버리고 김천 봉계로 낙향했다.
이성계와의 대립으로 집안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처지가 되자
처가가 있던 봉계로 입향한 조심.
김천의 창녕 조씨 입향조가 된 명당에 관련한 전설과 함께
조문삼문장이라 불리며 창녕 조씨 문중을 빛냈던 조씨 삼 형제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현침혈 명당에 자리한 입향조 조심의 묘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김천 봉산면 인의리 봉계마을로
낙향했던 정윤홍. 그가 죽자 다섯 아들은 지관을 불러 명당을 찾았다.
지관이 가리킨 곳은 지금의 김천 봉산면 예지리 외입석마을에 위치한 방목산자락,
지관은 이 터를 두고 "극락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멀리 황악산을 안산(案山)으로,
샘골과 큰골을 각각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右白虎)로
삼은 현침혈(縣枕穴)의 명당"이라고 설명했다.
마침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친정에 온 조심의 아내 서산 정씨는
아버지의 묏자리가 대 명당이라는 지관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이미 지역의 명문으로 자리를 잡은 친정보다 이제 갓 봉계로 입향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댁을 생각하면 명당에 욕심이 났다.
서산 정씨는 시댁이 명당을 양보받기 위해 꾀를 냈다.
친정아버지의 출상 일에 앞서 지관이 잡아놓은 묏자리에다
밤새 옆에 위치한 옹달샘에서 물을 길은 뒤 묘광(墓壙)에 물을 채웠다.
출상 일에 상여가 묘역에 당도해보니 전날 파놓은 묘광에 물이 가득했다.
상주들이 매우 놀랐다. 논의 끝에 "아무리 명당이라고는 하나 물이 솟는 땅은 불길하니
다시 지관을 불러 살피게 하자"고 결정하고 다시 터를 잡은 곳이 산 너머 분통골이다.
훗날 조심의 아내인 서산 정씨는 남편이 죽자 친정에 부탁해 방치돼 있던
방목산 친정아버지의 묏자리를 자신에게 달라고 간청해 남편 조심의 묘가 들어서게 됐다.
명당의 기운을 받은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조심이 처향(妻鄕)인 봉계에 입향한 이래
창녕 조씨 문중에서는 고관대작(高官大爵)을 무수히 배출하며
김천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발돋움한다.
반면 당시 봉계에서 명문으로 번성하고 있던 서산 정씨는 봉계에 사는 후손을 지금 찾기 힘들다.
창녕 조씨 문중에서는 친정아버지의 묏자리에 남편의 묘를 들인 서산 정씨 부인에 대해
"출가한 여인의 몸으로서 이미 명문가로 자리매김한 친정보다는
갓 뿌리를 내리려는 시댁의 번성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두려움을 떨치고
밤새 물을 날랐으니 오히려 가상하다"고 칭송했다.
한편, 명당에 입향조의 묘소를 들인 덕분으로 번성하게 된 창녕 조씨 문중에서는
최근까지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해마다 서산 정씨 입향조의 묘제에 참석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2년여 전 서산 정씨 문중에서 입향조 정윤홍의 묘소를 이장하면서
두 가문 간의 묘제 교류가 끊겼다고 한다.
◆조문삼문장(曺門三文章)
조심의 봉계 입향 이후 창녕 조씨 문중에서 두드러진 인물은 조계문(曺繼門` 조심의 둘째 아들)의
아들 조전(曺佺), 조위(曺偉), 조신(曺伸) 3형제다. 이들은 조문삼문장(曺門三文章)으로 불렸다.
특히, 조심의 손자가 되는 매계(梅溪) 조위(1454~1503)는 성종 때
도승지와 호조참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며 대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또 영남 사림의 종주로 추앙받는 점필재(占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조심의 손녀사위가 되는 등
성종 때에 이르러 창녕 조씨 문중이 김천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조문 삼문장 중 맏이는 조전이다. 서출(庶出)로 조위의 형이었던 조전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조전이 송당(松堂) 박영(朴英`1471~1540)의 인품을 기려 지은 시 '송당'이 '송당문집'에 실려 있다.
'어성정 아래 길은 험난하고 / 대개 세상의 영웅은 물가에 있어 /
백구가 호탕하게 물결치는 것을 한참 대하니 / 세간의 영욕을 누구에게 물어보나?'
(御聖亭下路崎嶇 蓋世英雄在水隅 長對白鷗波浩蕩 世間榮辱問阿誰)
조위는 7세에 이미 시를 지을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매형인 김종직에게 성리학을 배우고 1472년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후,
21세가 되던 1474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합격하며 벼슬길에 나섰다.
홍문관 정자, 홍문관 부수찬, 경연 검토관, 시강원문학과 홍문관 부응교 등을 거쳐
1498년 동지중추부사 겸 부총관이 되었고, 성절사로 북경에 갔다가 돌아오기 전에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의 사고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체포`투옥되었다.
윤필상(1427~1504)과 이극균(14437~1504)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의주`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1503년 귀양지에서 병을 얻어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위는 당시 사림 사이에서 대학자로 추앙되었고, 김종직과 더불어 신진사류의 지도자였다.
저서로는 '매계집'이 있고, 유배 가사의 효시로 불리는 '만분가'가 있다.
그리고 '두시언해의 서문'과 '매계 총화', '조계문 묘비'를 지었으며,
왕명으로 '독서당기'와 송도를 유람하고 '송도록'을 남겼다.
조문삼형제의 막내 조신(1454~1529)은 조위의 이복동생이다.
어려서부터 형인 조위와 함께 시문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조위와 함께 매형인 김종직에게 학문을 배우고 문학적 재능을 길렀다.
생각과 표현력이 남달랐으나 서얼(庶蘖) 신분의 제약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는 외국어에 능해 신분과 재능을 살려 역관의 길을 걸었다.
1479년 신숙주(1417~1475)가 통신사로 일본에 가게 되자 역관으로 수행했고
모두 세 차례나 일본을 왕래하면서 문장으로 일본의 조야를 놀라게 했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수행한 적도 일곱 차례나 된다.
북경에서 안남국(현 베트남) 사신 레티꺼와 시문을 주고받아 베트남과 교류의 문을 열었고,
조신의 문명이 동남아로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외교적 공적으로 서얼로서는 파격적인 종3품의 사역원정에 특진되었다.
1518년 김안국과 더불어 '이륜행실도'를 편찬했다.
이 외에 '적암시고', '백년록', '소문쇄록' 등의 저서가 있다.
1529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인 1543년 조정 대신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서출이며 역관 출신인 조신에게 파격적으로 공조판서를 추증하고, 효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김천 신현일 기자 hyunil@msnet.co.kr
공동기획 김천시
<참고문헌>
김천시사
김천 종가문화의 전승과 현장(민속원)
김천의 마을과 전설(송기동)
대간 숨을 고르다, 황악(박용우)
디지털김천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조실록
<자문>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조운현 창녕 조씨 참의공파 종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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