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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세계문화유산.유적

세계문화유산등재 서원~(4)경주 옥산서원

by 안천 조각환 2019. 7. 13.

옥산서원은 경주 안강읍 옥산리에 있으며,  사적 제154호이다.

2019년 7월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선생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572년(선조 5)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창건했다.

 

옥산서원 강당인 구인당 ~ 옥산서원 편액은 김정희의 글씨이다

 

1574년 사액(賜額) 서원이 되었으며. 1871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정문인 역락문(亦樂門),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한 체인묘(體仁廟),

강당인 구인당(求仁堂), 제기실(祭器室), 민구재(敏求齋)·은수재(誾修齋),

무변루(無邊樓), 이언적의 신도비각(神道碑閣), 내사전적(內賜典籍)과

이언적의 문집 및 판본을 보관하던 경각(經閣)·판각(板閣) 등이 있다.

 

서원 정문인 역락문(亦樂門)

 

옥산서원의 편액(扁額)은 원래 이산해(李山海)의 글씨였으나,

1839년 화재로 구인당을 새로 지으면서 김정희(金正喜)가 다시 썼다.

대청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은 명필 이산해의 글씨이며,

구인당과 무변루 편액은 한석봉의 글씨다. 

 

무변루(無邊樓)

 

서원에서 서북쪽으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이언적선생의

고택인 독락당이 있다. 회재의 불천위 제사(음력 11월 23일)는 회재종택인

양동마을의 무첨당에서 지내며 다른 종가와 달리 전은 쓰지 않는다.

 

안쪽에서 본 무변루

 

한석봉의 글씨인 무변루(無邊樓)

 

무변루옆 400여년된 향나무

 

동재와 서재

 

이언적의 신도비각

 

 문집및 판각을 보관하는 경각

 

담장 밖의 은행나무

 

서원 앞 자계(紫溪)의 세심대(洗心臺)

 

용추폭포

 

바위에 새겨놓은 용추(龍湫)

 

독락당 출입문(대문)

 

옥산서원에서 자계(紫溪)를 700여m를  거슬러 올라가면

회재 이언적의 고택인 독락당이 있으며, 이 건물은

이언적이 살아있을 때 지은 건물(1532년)로 독서실로 이용하던 곳이다.

 

경청재(敬淸齋)

 

이언적(1491~1553)은 경주 출신으로 본관은 여강(驪江: 여주(驪州)이며).

초명은 이적(李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회재라는 호는

회암(晦菴: 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준 것이다.

아버지는 생원 이번(李蕃)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딸이다.

 

독락당 건물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해주었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처마밑에는 옥산정사 편액이, 마루안에는 독락당 편액이 걸려 있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

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 좌찬성이 되었다.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구인록(求仁錄)등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

 

자계로 이어지는 토담길

 

계정(溪亭)

 

이 계정은 이언적의 부친인 이번(李蕃)이 남긴 정자자리에 지었다.

 

계정옆의  관어대(觀魚臺)

 

서원 바깥의 옥산서원 유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