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햇볕이 작렬하는 8월초의 명재고택은 붉게물든 배롱나무꽃이 활짝 반긴다.
모처럼 파란하늘이 열리고 뭉개구름이 두둥실 떠오르는 청명한 날씨에 다시 고택을 찾았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의 명재 윤증(明齋 尹拯·1629~1714) 고택은
계룡산에서 갈라진 노성산 자락의 양명한 터에 자리잡고 있다.
윤증은 평생동안 조정으로부터 20번이 넘는 벼슬을 제의 받았으며
말년에는 숙종이 직접 정 1품 우의정을 준다고 해도 나아가지 않았다.
조선 선비 중 임금이 당사자의 얼굴 한번 보지 않고
정승 자리를 제수한 경우는 윤증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윤증이 그처럼 벼슬자리를 거부한 이유는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결별했기 때문이다.
노론 중심의 정치체제를 거부한 윤증은 노론의 전횡을 끊임없이 비판했다.
그는 일생에 딱 한번 벼슬을 하려고 서울 근교의 과천까지 올라갔던 적이 있었다.
그는 벼슬을 하는데 있어서 전제조건이 있었는데
당시 정치적으로 소외받던 영남의 남인들을 포용할 수 있는 내각구성을 하면,
조정에 입각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즉 지역차별이 해결되지 않으면 벼슬을 하지 않겠다는 전제였다.
당시는 영남의 남인들이 기호지방의 노론들에게 밀려 심각한 지역차별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윤증은 당대의 논객이라 할 수 있는 박세채(朴世采)와 과천에서 이 문제를 밤새도록 토론한 끝에,
이 전제조건이 실현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결연하게 벼슬을 포기해 버린다.
고택 입구의 배롱나무
연못은 파란 개구리밥으로 뒤덮였다
더운 몸을 잠시 배롱나무 그늘에 쉬고 고택을 둘러본다
가지런히 놓인 검정고무신
앞마당 꽃밭의 상사화(일명 난초)
장독대는 열을 가한다
윤증 고택은 담장이 없다.
여자들이 사는 안채에만 담장이 있고, 사랑채 앞 넓은 마당에는 담벼락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대문과 담장 없이 사랑채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는 우리 나라 고택에서 매우 희귀하다.
윤증이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살았던 무외(無畏)의 처사였음이 드러난다.
고택의 명물인 장독대
느티나무 사이로
고택 바로 옆의 노성향교
담 너머로 보는 명륜당
향교를 돌아 나오면 연못의 녹색 개구리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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