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과 강직으로 존경 받았던 보백당 김계행(寶白堂 金係行,1431~1517)
선생의 본관은 안동(安東)이요.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이며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1447년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김종직(金宗直)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익혔다.
그 뒤 성주와· 충주의 향학교수를 지냈고 늦은 49세때인 1480년(성종 11)
식년 문과인 대과에 급제하여 50대 이후부터 본격적인 벼슬을 시작했다.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이조참의 등을 역임했으나 부조리한 정치현실을
비판하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렸기 때문에 사임과 취임을 반복해야만 했다.
마침내 무오사화를 겪으면서 현실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인 안동 길안 묵계리로 돌아온다.
풍산사제(豊山笥堤) 위에 조그만 정자를 지어 ‘보백당(寶白堂)’이라 하고
학생을 모아 가르치니 보백선생(寶白先生)이라 불리었다.
김종직 등과 교유한 것으로 말미암아
무오사화와·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다행히 큰 화는 면하였다.
1706년(숙종 32) 지방유생들이 덕망을 추모하여 묵계서원(默溪書院)을 짓고 향사하였다.
1859년(철종 10)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한옥숙박을 하고 있어 여러 시설물과 표지판들이 많다-
-만휴정(晩休亭)은 보백당의 맞은편 계곡에 세운 정자이다.
'늦게야 쉰다'는 뜻이 말해주듯, 보백당이 벼슬을 버리고
말년에 고향에 돌아와 세운 만휴정은 주변 경치가 일품이다.
조선 선비들은 계곡에서 정자를 지어 거주하는 계거(溪居)를 최고로 여겼다.
계거는 시냇물과 바위 그리고 소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조선 산수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계곡의 흐르는 물소리는 지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이다.
보백당 김계행선생은 87세에 운명하면서
자손들을 전부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
"오가무보물(吾家無寶物)이오, 보물유청백(寶物惟淸白)이라."
"우리 집에 보물은 없다. 보물이 있다면 오로지 청백 뿐이다"는 뜻이다.
그의 유언은 조선 선비가 생명처럼 지키려 했던 정신의 뼈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로 이 유언의 글이 만휴정 위 계곡 너럭바위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산수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만휴정은
선비의 품격을 엿볼 수 있음과 함꼐,
조선 인문정신의 정수를 함축하고 있는 정자로 볼수 있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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