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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종택,고택,생가

도산서원과 퇴계종택

by 안천 조각환 2016. 3. 29.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으로 사적제1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북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위치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낙향 후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1561년(명종 16)에 설립되었으며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서원 입구의 매화


매화나무옆 산수유


도산서원 전경


서원 앞 마당으로, 바로 보이는 곳이 진도문이고 우측이 도산서당이다


도산서당

퇴계선생이 낙향후 몸소 거처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동편인 도산서당 건물을 ‘박약재(博約齋), 서편 건물을 ‘홍의재(弘毅齋)’라 하는데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도산서당 측면


진도문 좌.우의 광명실(光明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오늘날의 도서관에 해당한다



진도문(進道門)


진도문 안에서 내려다 보는 앞 마당


전교당(典敎堂) 보물 제210호

"도산서원"의 편액은 한석봉의 글씨로 1575년(선조 8)에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다.

전체 교육시설은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과 중앙의 전교당(典敎堂)을 기준하여 좌.우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다.


 상덕사와 삼문(보물 제211호)

이곳에는 퇴계 이황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건물 왼편에는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책판을 보관하던 장판각(藏板閣)



광명실


역락서재(亦樂書齋)

이 건물은 서당의 제자인 정사성(鄭士誠)이 입학할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 기부한 것으로 서원에서 도산서당과 같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정사성은 안동출신으로 본관은 청주, 1561년(명종16)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1568년 진사시에 합격, 양구현감을 지낸 조선중기 문인이다.



학봉 김성일이 스승인 퇴계 이황을 평한 글

"선생의 학문은 명백하고 쉽다. 선생의 도는 광명정대하다.

선생의 덕은 온화한 바람이요, 경사스러울 때 이는 서운(瑞雲)이다.

선생의 글은 의복이며 음식이다.

선생의 마음과 도량은 가을 하늘 밝은 달이며,

탁 틔어보이는 얼음 유리 항아리다.

선생의 기상은 순결해 아름답게 갈고 닦은 금과 옥이다.

산악처럼 무겁고 소와 샘처럼 깊고 고요하다.

바라보면 안다.

선생이 성덕군자가 되었음을..."



퇴계 이황선생과 관기 두향(杜香)에 얽힌 이야기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부임한것은 49세때이며 이때 두향의 나이는 18세였다.

이즈음 이황은 정실 부인과, 후실 부인과도 사별하였으며 아들 또한 잃어 심신이 많이 쇠약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선생은 비록 곧은 성품이었지만 두향과 더불어 시화(詩畵)와 음률(音律)을 논하게 되었다.

때마침 이른 봄이라 두향(杜香)은 애지중지하던 분매(盆梅)에 매화꽃이 곱게피어

퇴계 이황선생의 처소에 옮겨 놓으니, 이를 본 퇴계 이황은 은은하게 풍기는 매화향에

반기는듯 했으나 곧 가져온 가져온 사람에게 돌려줄것을 명한다.

이에 두향은 퇴계 이황선생이 6년전에 지은 매화시를 읊으며 아뢰길,

매화는 고상하고 아담하여 속기가 없고, 추운때에 아름답게 꽃을 피우며, 운치와 향기가 호젓하여 격조와 기품이 있으며

비록 뼈대는 말랐지만 정신이 맑고, 찬 바람과 눈보라에 시달려도 곧은 마음이 변치 않기에

 곁에 두시고 심신의 안정을 찾아 단양 고을을 잘 다스려 주시옵소서, 하였다.

이에 퇴계 이황선생은 두향의 간청을 더 이상 물리치지 못하고

두향으로 부터 받은 청매를 동헌의 뜰에 심게되었다.



그러나 이황선생은 단양군수로 부임한지 열달만에 경상도 풍기군수로 이임하게된다.

퇴계와 두향이 이별을 앞둔 마지막날 밤

짧은 인연뒤에 찾아온 이별 앞에 군수와 관기로써 무슨말을 할수 있었겠는가마는

퇴계가 먼저 말문을 열고 치마폭에 시를 써준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死別己呑聲)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 없네 (生別常惻惻)

"내일이면 떠난다. 다시 만날 기약이 없으니 두려움 뿐이다."


이에 두향은 말 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제

어느듯 술 다하고 님 마져 가는구나

꽃 지고 새우는 봄 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노년에 퇴계선생은 안동의 도산서당에 머물었는데,

단양을 떠날 때 두향이 청매를 이곳에 심었으며, 서원 입구에 절우사(節友社)란 화단을 꾸며

정자를 짓고 매화, 소나무, 대나무, 국화를 심어 즐겼다 한다.

또한 두향이 매화를 도산으로 보내면서 치마폭을 함께 보냈는데

그 치마폭에 다음과 같이 단시를 써주었다.

  서로 보고 한번 웃은 것 하늘이 허락한 것이었네 (相看一笑天應許)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봄날은 다 가려고 하는구나 (有待不來春欲去)

이 시는 단양을 떠나올 때 써준 시와 합하면 전구와 결구가 완결된다.


이 외에도 매화를 소재로 한 시를 100여편이나 지었는데

그 중 퇴계 이황이 1552년에 두향을 그리워하며 지어 보낸시


상사별곡

     옛날 책속에서 성현을 만나보며 (黃券中間對聖賢)

     비어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아 있노라 (虛明一室坐超然)

    매화 핀 창가에 봄소식 다시 보니 (梅窓又見春消息) 

     거문고 대에 앉아 줄 끊겼다 탄식하지 않으리 (莫向瑤琴嘆絶絃)


 비록 두향을 가까이 둘 수 없으나 매화를 보며 두향을 생각한 퇴계선생의 속 마음을 엿  볼 수 있다



1000원권에 들어있는 퇴계 이황선생과 청매화  



버드나무 앞에서 보는 도산서원


도산서원에서 보는 낙동강

-지금은 안동댐 물이 줄어 그 옛날 서원 앞 강의 운치를 볼 수 있다-



퇴계종택과 열녀문(烈女門)



퇴계 이황의 불천위제사는 이곳 추월한수정 대청에서 지내며 기일은 음력 12월 8일이다


불천위 신주가 있는 사당


퇴계 이황선생이 손자가 장가갈때 써준 편지

"부부는 남녀가 처음 만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친밀한 관계를 이룬다.

또 한편 가장 바르게 해야하고 가장 조심해야 하는 처지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의 도가 부부에서 발단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은 모두 예와 존경함을 잊어버리고 서로 버릇없이 친하여,

마침내 모욕하고 거만하며 인격을 멸시해 버린다.

이러한 일은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지 않은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