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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梅溪 曺偉 先生

매계 조위선생의 독서당기

by 안천 조각환 2020. 2. 9.


매계 조위선생 초상


독서당의 연원

독서당은 조선시대에 젊은 문관 중에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 휴가를 주어,

오로지 학업에 전념하게 하던 서재이자 관서였다.

위치는 서울의 남쪽 옥수동(玉水洞)한남동(漢南洞)보광동(普光洞)

등지의 강변으로 경치가 좋고 한적한 곳이었다.

독서당의 연원은 세종대의 사가독서(賜暇讀書)에서 시작한다.

세종은 1426(세종 8) 12, 젊은 문신 중에 재주가 뛰어난 자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사가독서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장소가 한정되었으므로 독서와 연구에만 전념하기에는 미흡하였다.

그래서 1442(세종 24) 사가독서를 시행할 때는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하게 하는 상사독서(上寺讀書)를 실시하였다.

이 상사독서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여 집현전을 혁파함으로써 폐지되었다.

그 뒤 성종은 다시 사가독서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자택에서 하는 독서는 내방객들 때문에 연구에 불편한 점이 많고,

상사독서는 유교정책의 견지에서 볼 때 불교의 여러 폐습에 오염될 가능성이 허다하므로

상설국가기구인 독서당을 두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1491(성종 22) 성종은 용산에 있는 폐사(廢寺)인 장의사(藏義寺)를 수리하여

처음으로 독서당을 두고, 남호(南湖) 독서당이라 하였으며,

이후에 옥수동 일대로 옮겨 동호(東湖) 독서당이라 하였다.

독서당을 호당(湖堂)이라고도 불렀기 때문에 남쪽의 호당,

동쪽의 호당이라는 의미로 남호, 동호로 불린 것이다.

성종 때의 학자 조위(曺偉 1454~1503)선생이 쓴 독서당기(讀書堂記)에는

성종 때 독서당을 설치한 유래와 그 취지가 잘 밝혀져 있다

  

독서당기(讀書堂記)       

                 매계 조위(梅溪 曺偉)

  커다란 집을 짓는 자는 먼저 경남(梗楠 : 가시나무와 녹나무)

기재(杞梓 : 소태나무와 가래나무)의 재목을 몇십 백 년을 길러서

반드시 공중에 닿고 구렁에 솟은 연후에 그것을 동량(棟梁)으로 쓰게 되는 것이요,

만 리를 가는 자는 미리 화류(驊騮 : 나라 穆王이 타던 준마)

녹이(騄駬 : 목왕이 타던 준마)의 종자를 구하여 반드시 꼴과 콩을 넉넉히 먹이고,

그 안장을 정비한 연후에 가히 연나라와 초나라의 먼 곳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니,

국가를 경영하는 자가 미리 어진 재사를 기르는 것이 이와 무엇이 다르리오.

이것이 곧 독서당을 지은 까닭이다.

[建大廈者 豫養梗南杞梓之材 於數十百年 必待昻霄聳壑 然後取爲棟樑之用

適萬里者 豫求驊騮騄駬之種 必豊其芻豆 整其鞍鞁 然後可達燕楚之遠 爲國家者

豫養賢才 亦何以異於此 此讀書堂之所由作也] 


 삼가 생각하건대, 본조(本朝)에 열성(列聖)이 서로 계승하고 문치(文治)가 날로 높아,

세종대왕께서 신사(神思)예지(睿智)가 백왕(百王)에 탁월하여

그 제작의 묘함이 신명(神明)과 부합되어

전장(典章)과 문물은 유학자가 아니면 함께 제정할 수 없다.” 하시고는,

널리 문장(文章)의 선비를 뽑아서 집현전을 두고 조석으로 치도(治道)를 강하고,

의리(義理)의 오묘함을 연구하고, 뭇 글의 호양(浩穰)함을 널리 종합하려면

전문의 업이 아니면 능히 할 수 없으리라.” 하셨다.

비로소 집현전 문신 권채(權採) 등 세 명을 보내되, 특히 긴 휴가를 주어

산 절에서 글을 편히 읽게 하였고, 그 말년에는 또 신숙주(申叔舟) 6명을 보내어,

마음껏 즐기며 실컷 그 힘을 펴게 하셨다.

[恭惟 本朝列聖相承 文治日臻 世宗大王神思睿智 卓越百王 制作之妙

動合神明 以爲典章文物 非儒者 莫可共定 博選文章之士 置集賢殿 朝夕講劘治道

又以爲硏窮義理之奧妙 博綜群書之浩穰 非專業莫克 始遣集賢文臣 權採等三人

特賜長暇於山寺 任便讀書 季年 又遣申叔舟等六人 便得優游厭飫 大肆其力]


  문종께서도 이 뜻을 이어 유아(儒雅)에 뜻을 돈독히 하여,

또 홍응(洪應) 6명을 보내어 휴가를 주었다.

이에 인재의 성함이 한때에 극하고, 저작의 아름다움이 중국(中國)에 비기게 되었다.

지금 왕(성종)께서 위에 오르시자 먼저 예문관을 열어

옛 집현전의 제도를 회복하고 날로 경연에 앉아 문적의 연구에 정신을 두어,

유술(儒術)을 높이고 인재를 양육하니 옛날에 비교하여 더함이 있었다.

[文宗繼緖 篤志儒雅 又遣洪應等六人給暇 於是 人才之盛 極於一時 述作之美

侔擬中國 今上卽位 首開藝文館 復古集賢之制 日御經筵

覃精文籍 尊崇儒術 育養人才 視舊有加]


  병신년에 다시금 조종(祖宗)이 한 것처럼 채수(蔡壽) 6명에게 휴가를 주었고,

올봄에 또 김감(金勘) 8명에게 휴가를 내리되, 장의사(藏義寺)에서 글을 읽게 하고,

옹인(饔人)을 시켜 식사를 보내고, 주인(酒人)으로 하여금 단술을 담게 하고,

때로 중사(中使)를 보내어 하사물이 빈번하였다.

그리고 이내 정원(政院)에 교서를 내리기를,

마땅히 성 밖에 땅을 골라 당()을 열어서 독서할 곳을 만들라.” 하셨다.

[歲丙申 復用祖宗朝故事 命蔡壽等六人 賜暇 今年春 又命金勘等八人賜暇

就藏義寺讀書 饔人致餼 酒人設醴 時遣中使 錫賚便蕃

仍敎政院曰 宜於城外 擇地開堂 以爲讀書之所]


  정원에서 아뢰기를,

용산의 작은 암자가 이제 공해(公廨)에 소속되어 폐기되었으니,

잘 수리한다면 지대가 높고 아늑하고 광활하여,

장수(藏修)하고 유식(遊息)하는 장소로서 이곳이 가장 적당합니다.” 하였다.

왕이 그 청을 옳게 여기어 관원을 보내 역사(役事)를 감독하게 하여 두 달 만에 완성하였다.

집이 겨우 20칸이었으나 서늘한 마루와 따뜻한 방이 각기 갖추어졌다.

이에 독서당이라 사액하고 신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셨다.

[政院覆啓 龍山小菴 今係公廨 棄之矣 修而葺之 爽塏幽曠 藏修遊息 此最爲宜

上可其請 遣官董役 閱兩月而成 凡爲屋 僅二十間 而夏凉冬燠

各具其所 於是賜額曰讀書堂 命臣爲記...(下略)]


*참고로 매계 조위선생은 23세때인 1476(성종 7) 6, "성종임금의 명으로

조위(曺偉), 채수(蔡壽), 권건(權健),허침(許琛), 유호인(兪好仁), 양희지(楊熙止)

6명을 선발되어 장의사(藏義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