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계 조위선생은 감사로 부임하는길에 경주에 들러
먼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집경전에 가서 참배하고 영모사를 둘러보면서,
이전에 둘러보고 시를 남겼던 반월성,첨성대,금장대,포석정,무열왕릉 등
5곳과 합하여 계림팔관(계림의 8가지 볼거리)이라 이름하고는
만일 중국의 유명한 시인 소동파가 진작 이곳에 들러보고
시를 읊었다면 천하에 명승이 되었을 것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이제 그 계림팔관,집경전 영모사를 차례로 따라가 본다.
계림과 반월성앞의 첨성대
계림팔관(鷄林八觀)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소동파가 봉상의 방백으로 부임해서 고적을 읊어 “팔관”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 중에 왕유와 오도자가 그린 유마상과 진흥사각 같은 것은
단지 한 불사를 본 것이니 짓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계림은 신라의 옛 도읍으로 변화했던 문물이 지금은 다 없어졌으나
그 유적은 역력히 헤아릴만하다.
*소동파(蘇東坡, 1036~1101) 중국 북송시대의 시인, 산문가, 예술가, 정치가
본명은 소식(蘇軾), 자는 자첨(子瞻), 당송팔대가의 한사람이다.
*봉상(鳳翔) 중국 섬서성 위수유역에 있는 도시
*왕유(王維,699~759) 중국 당나라 때 시인, 화가
*오도현(吳道玄) 중국 당나라 때 화가, 불화와 산수화가 당대 제일
*유마(維摩) 인도 비사리국의 장자, 석가의 제자, 유마경의 주인공
*정관(貞觀)연간 : 중국 당나라 태종(627~649재임)의 연호
반월성의 봄
내가 감사의 명을 받고 부임하는 길에 여기를 지나게 되었다.
먼저 우리 태조의 진전에 배알한 뒤
신라의 고적을 두루 돌아보고 배회하면서 감개하여 이따금 시로 읊조린 것이 있어
이를 또한 제목 하여 “팔관”이라 했다. 이것은 감히 소동파를 본뜨고자 함이 아니요,
지은 것이 대개 여덟 수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영묘사와 금장대 같은 것은 비록 기록할만한 일이 없으나
영묘사는 당나라 정관 연간에 창건된 것으로 지금도 홀로 남아있고,
금장대는 계림을 굽어보아 일망무제하니 도성의 으뜸가는 경승지이기에
아울러 근체시로 읊어 훗날에 와서 유람하는 사람에게 끼쳐준다.
분황사지
아! 이 계림은 해동의 구석진 곳에 있어 중국과의 거리가 만 리나 된다.
그러나 만약 소동파가 한번 와서 구경하였다면 뛰어난 역작을 남겨
삼한을 뒤흔들고 빛냈을 것이다.
그 지은 바가 어찌 팔관 에서 그치겠는가?
이 어찌 이 땅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보문지 야경
보문지 수양벗꽃
대릉원 야경
눈속의 오릉 앞
눈으로 덮인 대릉원
대릉원 천마총 뒤 연못
동궁지(안압지) 설경
안압지 눈오는 날 야경
조위선생이 다녀간 당시의 영묘사는 지금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없으나
여러번 감탄한것으로 보아 선덕여왕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휘황찬란하게 건축했었는지, 지금은 볼수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다만 현재의 흥륜사 자리가 엣 영묘사 자리인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고.
흥륜사도 완전히 복원된것이 아니고 그 영묘사지(흥륜사지,사적 제15호)에
일부 건물만 고증없이 허술하게 지어 관리하고 있어 아쉬움을 더한다.
영묘사지에서 발굴된 천년의 미소 기왓장
영묘사(靈妙寺)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큰길가의 옛절 (古刹臨官道)고찰임관도
만 길 높이로 솟아있다 (巍峩高萬丈)외아고만장
지붕 아래로 구름이 지나가고 (棟宇行雲低)동우행운저
처마 밑으로 바다해가 떠오른다. (觚稜海日上)고능해일상
*영묘사(靈妙寺) : 경주 사천미에 세워졌던 절로 현재 흥륜사로 추정
영묘사지에서 발굴된 석물
현판엔 묵은 안개가 깃들고 (宿霧栖璇題)숙무서선제
흐르는 노을은 금방으로 숨어든다. (流霞隱金牓)유하은금방
요사채는 하늘밖에 펼쳐져 있고 (紀寮天外開)기요천외개
풍경은 허공을 향해 메아리친다. (風鐸空中響)풍탁공중향
흥륜사 석탑
번쩍이는 황금 불상 (赫赫金仙軀)혁혁금선구
휘황찬란한 달빛 (綵暈光滉朗)채운광황랑
사방 벽엔 단청이 현란하고 (四壁絢靑紅)사벽현청홍
탱화에는 여러 상들이 그려져 있다. (人天繪衆像)인천회중상
흥륜사 대웅전
주당과 보개들은 (珠幢與寶蓋)주당여보개
얼룩져 뒤섞여있다. (漫漶集坌坱)만환집분앙
잠깐 그 안을 들여다보니 (我暫窺其中)아잠규가중
기둥들이 미로처럼 위아래로 엮여있어 (結構迷俯仰)결구미부앙
이것은 인력이 미칠 수 없으리라. (謂非人力施)위비인력시
감탄하며 아득한 상상을 일으킨다. (感歎起遐想)감탄기하상
*주당(珠幢) 구슬로 장식한 깃발
*보개(寶蓋) 탑에서 보륜위에 덮개모양을 이루고 있는 부분
흥륜사 금당
옛날 선덕여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에 (善德昔司晨)선덕석사신
부처를 섬기고 장려함이 지나쳤네. (事佛過崇獎)사불과숭장
나무 하나에 백금을 허비하고 (一木費百金)일목비백금
주춧돌 하나에 만금을 버렸다네. (一礎損萬鏹)일초손만강
나라 경영이 이 지경에 이르러도 (經營乃至此)경영내지차
내탕금 허비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네. (不恤傾帑藏)불휼경탕장
*선덕여왕(善德女王) : 신라 제27대 왕(재위 632~647),성은 김, 휘는 덕만(德曼)
부처의 힘을 빌려서 (欲借迦維力)욕차가유력
넓디넓은 사바세계를 다스리려고 하였었네. (普沾世界廣)보첨세계광
어찌 원망 탄식소리 없으리. (豈無怨咨聲)개무원자성
복리는 마침내 허사가 되었네. (福利竟蟒矘)복리경망당
재앙을 당한 천년 뒤에도 (劫火千載餘)겁화천재여
우뚝이 서서 용상을 지키고 있구나. (巍然護龍象)외연호룡상
당시의 조정과 시장은 흔적 없어도 (當時朝市空)당시조시공
귀신같은 공적은 찬탄할 만하다. (鬼功嗟可賞)귀공차가상
정관년을 손꼽아 헤아려 보고 (屈指貞觀年)굴지정관년
바람 속에 손바닥을 비빈다. (臨風一拊掌)임풍일부장
*정관년(貞觀年) 당나라 태종 때의 연호(627~649)로 선덕여왕 재위를 말함
집경전지 안내판
*집경전(集慶殿)이란 조선 태조의 영정을 모셔두기 위해 세운 전각인데
조선시대에는 국조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향하는 진전을 서울에는 문소전(文昭殿) 한 곳,
외방에는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영흥의 준원전(濬源殿), 경주의 집경전,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개성의 목청전(穆淸殿) 등 다섯 곳에 두고 유지하였다.
경주 집경전은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세워지고,
국가에서 추인하여 태조 진전으로 기능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태조 어진만 강릉으로 옮겨져 강릉 집경전으로 유지되다가
1631년 화재로 인해 전각과 초상화가 모두 불타 버렸고 이후 복구되지 못하였다.
1796년(정조 20)에는 경주 집경전 터에 ‘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
다섯 글자를 세운 비를 세워 태조 진전이 있던 옛 터임을 알리게 하였다.
집경전터에 남아있는 태조 어진 봉안 석실
집경전(集慶殿)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보전숙음음(寶殿肅陰陰) 보전은 엄숙하고도 음습한데
신광승고고(晨光升杲杲) 새벽빛이 높이 떠오른다.
요지채장렬(瑤池綵杖列) 요지는 꽃나무로 벌려있고
수달향연소(繡闥香煙繞) 단청한 문들은 향연에 둘러있다.
태조 이성계 어진(전주 경기전)
궁궁개창합(宮宮開閶闔) 궁지기가 문을 열고 닫으니
청소심경요(靑銷深更窈) 푸르름에 쌓여 깊고도 그윽하구나.
소신배계수(小臣拜稽首) 소신은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목목첨천표(穆穆瞻天表) 삼가 공경하며 영정을 바라본다.
봉안 석실
용안여일각(容顔與日角) 얼굴과 이마는 태양과 같이
준상천하소(俊爽天下少) 준수하여 천하에 드물었다네.
하의중동광(何意重瞳光) 어찌 생각했으랴. 임금님의 모습이
출자호단묘(出自毫端妙) 신묘한 붓끝에서 나왔음을
축적불감앙(踧踖不敢仰) 몸이 움츠러들어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고
한유협포오(汗流浹袍襖) 땀이 비 오는 듯 도포를 적신다.
집경전구기비
차여생고만(嗟余生苦晩) 아! 나는 너무도 늦게 태어나
정호궁검묘(鼎湖弓劒杳) 태조의 승하가 아득하구나.
대재재안공(大哉濟安功) 크도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신 공이여
여천동호호(與天同浩浩) 하늘과 같이 넓고 넓도다.
집경전이 있던 자리
조계운이애(操鷄運已衰) 고려의 운이 이미 쇠약하여
홍동병진요(澒洞兵塵擾) 연달아 전쟁으로 요란했다네.
기년노즐목(幾年勞櫛沐) 몇 년을 수고로이 비바람을 맞으며
남정여북토(南征與北討) 남과 북을 평정하였네.
집경전 하마비
예략여천모(睿略與天謨) 예지와 천모를 갖추고
신병자신소(神兵資迅掃) 신병으로 신속히 쓸어내었네.
수령삼한민(遂令三韓民) 마침내 삼한의 백성들로 하여금
신음섭희호(呻吟燮熙皥) 신음하며 살다가 태평성대를 맞게 하셨네.
집경전 발굴 석물
육룡아비천(六龍俄飛天) 육룡이 잠시 하늘로 날아
일취당황도(日取當黃道) 하루 만에 어거가 황도에 이르렀네.
벽도화산양(闢道華山陽) 화산의 남쪽에 길을 열러
신경등풍호(神京等豊鎬) 경사를 주나라의 서울과 같게 하였네.
*육룡(六龍) 여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례로 임금의 어가를 말함
*화산(華山) 서울의 북한산을 달리 이르는 말
집경전 석굴 측면
회장태평구(恢張太平具) 태평성대가 펼쳐지니
문물극회조(文物極繪藻) 문물은 극히 아름다웠네.
루피전대규(陋彼前代規) 전대의 규범을 비루하게 여기니
이모개초초(貽謀豈草草) 자손들에게 남겨준 계책이 어찌 소략하겠는가?
잡경전과 접해있던 경주읍성
비현신성손(丕顯神聖孫) 우뚝하게 현달한 신성의 자손들이
계계무궁료(繼繼無窮了) 자자손손 끝이 없어라.
유상진고도(遺像鎭古都) 유상은 고도를 진정시키고
황령재궁호(皇靈在窮昊) 황령은 하늘나라에 있구나.
일부 복원된 경주 읍성과 석물
경주읍성 동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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