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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梅溪 曺偉 先生

매계 조위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51)마산 월영대

by 안천 조각환 2020. 3. 7.

월영대는 마산 해운동에 있는데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이 소요하던 곳으로,

월영대(月影臺) 석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고 글자 한자의 크기는 약 24㎝이다.

이 글씨는 최치원이 친히 각석하였다고 전하나 고증할 수가 없다.

현재는 해안에서 얼마간 떨어져 있으나

옛날에는 그 아래가 바로 백사장이어서 합포만의 승경을 즐길만한 곳이었다.

최치원이 산사(山寺)를 두루 다니다가 마지막 정착지로 이곳을 택하여

가족과 더불어 살다가 신라 멸망을 예견하고 합천 해인사(海印寺)로 들어갔다.

최치원선생이 사망 후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한 고려와 조선조 때의 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찾게되면서 우리나라 선비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마산 앞바다

고려때의 문신 정지상, 학자 김극기(金克己), 고려 충선, 충숙왕때 채홍철(蔡洪哲),

고려후기 학자 안축(安軸), 조선조때 초기의 대학자 이첨, 태종때 문신 정이오(鄭以吾),

세조때 문신 박원경, 성종 때 문신 매계 조위, 조선 중기의 대학자 퇴계 이황,

선조때의 의사(義士)정문부, 조선조 후기의 박사해, 손기양, 이민구, 신지혜 등이

이곳을 순례하고 남겨 놓은 명시들이 『동문선』(東文選), 『여지승람』(與地勝覽)에 남아 있다.

매계 조위선생을 비롯한 명사들의 시를 음미해본다.

 

1920년대의 마산 월영대

월영대에서 다시 정(지상)이 지은 시에 차운하다 (月影臺追次鄭(知常)韻)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해문 동쪽으로 바라보니 커다란 파도가 밀려오고    海門東望浪崔嵬(해문동망랑최외)

  천년 전 유선이 놀던 옛 누대가 남아있다.   千古儒仙有古臺(천고유선유고대)

  구름 그림자는 아득히 배 그림자 따라가고   雲影遙連帆影去(운영요연범영거)

  노 젖는 소리는 기러기 소리와 뒤 섞여 들린다.  櫓聲仍帶鴈聲來(노성잉대안성래)

 

  반석위에 흐릿한 글자를 어루만지며   摩挲石上模楜字(마사석상모호자)

  통술 앞에 넘쳤던 술잔을 상상한다.   想像樽前瀲灩盃(상상준전렴염배)

  당시의 풍류를 물을 길 없는데    當日風流無處問(당일풍류무처문)

  물가에는 한월아래 새들만 배회한다.   滿汀寒月鳥飛回(만정한월조비회)

 

  *정지(鄭知常) : 고려 인종 때의 문신이며 시인

*유선(儒仙) : 신라말기의 문인인 최치원선생을 말함

 

월영대(月影臺) 암각문

 월영대(月影臺

 

                       정지상(鄭知常, ?~1135.고려 인종 때 문신

 

아득히 푸른 물결 위에 우뚝 솟은 바위    碧波浩渺石崔嵬(벽파호묘석최외)

그중에 봉래 학사님 노닐던 누대 있네   中有蓬萊學士臺(중유봉래학사대)

단 옆에 소나무 늙어 가고 잡초만 무성한데   松老壇邊荒草合(송로단변황초합)

하늘 끝 구름 나직하니 조각배 떠오는 듯   雲低天末片帆來(운여천말편범래)

 

백년의 문아 뒤에 나온 새로운 시구요   百年文雅新詩句(백년문아신시구)

만리의 강산 위에 한 잔의 술이로세   萬里江山一酒桮(만리강산일주배)

돌아보면 계림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回首雞林人不見(회수계림인불견)

달빛만 공연히 해문을 비치며 배회하네   月華空照海門廻(월화공조회문회)   

 

 

월영대(月影臺)   - 채홍철(蔡洪哲,1262~1340.고려 충혜왕 때 문신)

 

문장의 지닌 벼슬이 갈수록 으쓱해서   文章習氣轉崔嵬(문장습기전최외)

문득 최후를 회상하여 한 번 대에 올랐네   忽憶崔侯一上臺(홀억최후일상대)

풍월은 황학 따라 가지 않았구나   風月不隨黃鶴去(풍월불수황학거)

연파는 길이 백구를 보내 오네   煙波相逐白鷗來(연파상축백구래)

 

비 개자 산빛이 난간에 나직이 짙고   雨晴山色濃低檻(우청산색농저함)

봄 늦어 송화가 술잔에 날려드네   春盡松花亂入杯(춘진송화난입배)

진세를 등진 거문고의 뜻이 있으니   更有琴心隔塵土(경유금심격진토)

일후에 비구름과 함께 좋이 다시 찾으리   他時好與雨雲迴(타시호여우운대)

 

월영대비각

 

월영대(月影臺)   -서거정(徐居正,1420~1488, 조선전기 문신)

 

월영대 앞에 달은 길게 있건만   月影臺前月長在(월영대전월잔재)

월영대 위에 사람은 이미 갔네   月影臺上人已去(월영대상인이거)

고운이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뒤   孤雲騎鯨飛上天(고운기경비상천)

흰 구름만 아득하여 찾을 곳이 없구나   白雲渺渺尋無處(백운묘묘심무처)

 

고운이여, 고운이여, 당신은 진정 유선   孤雲孤雲眞儒仙(고운고운진유선)

천하 사해에 명성을 전하였네   天下四海聲名傳(천하사해성명전)

고변 막하에 손들이 많건마는   高駢幕下客如織(고변막하객여직)

토황소격으로 재기를 뽐내었고   才氣穎脫黃巢檄(재기영탈황소격)

 

고운 학사가 송별시에 일렀으되    孤雲學士詩告別(고운학사시고별)

문장이 중화국을 감동하였다고   文章感動中華國(문장감동중화국)

본국에 돌아오니 시운이 기구하여   東還時運何崎嶇(동환시운하기구)

계림의 황엽이 차게 우수수 했것다    雞林黃葉寒颼颼(계림황엽한수수)

 

영웅이 실의하니 이를 어찌하리    英雄失志知何爲(영웅실지지하위)

여생을 길이 상산사호와 짝하여    永與綺皓相追隨(영여기호상추수)

가야산 중의 여울 속에 숨으락    伽倻山中藏鳴湍(가야산중장명단)

해운대 위에 피리불며 난새를 타락    海雲臺上騎笙鸞(해운대상기생란)

 

강남의 산수를 다 제것으로 만드니    江南山水牢寵畢(강남산수뢰총필)

강남의 풍월이 한가한 날 없었네    江南風月無閑日(강남풍월무한일)

고운이 한 번 가고 아니 돌아온 뒤    一自孤雲去不還(일자고운거불환)

만고에 그대로 있는 건 오직 강산뿐    萬古自如唯江山(만고자여유강산)

 

지금 사람 부질없이 고운을 말하나    今人空自說孤雲(금인공자설고운)

몇 사람이 고운의 무덤을 보았는가    幾人得見孤雲墳(기인득견고운분)

날아 올라가 상계의 신선이 된 뒤    飛昇已作上界眞(비승이작상계진)

상전이 벽해되어 지금에 천년    桑田滄海今千春(상전창해금천춘)

 

내가 와 술을 들어 서풍에 제하며    我來擧酒酹西風(아래거주뢰서풍)

고운을 불러다 함께 한 번 웃고자    欲喚孤雲一笑同(욕환고운일소동)

짧은 비석을 어루만지며 석양에 섰노라니    摩挲短碣立斜陽(마사단갈입사양)

고운은 오지 않고 부질없이 애만 끊이네    孤雲不來空斷腸(고운불래공단장)

 

월영대 비각(2020.7.9)
월영대 비각 편액

주포(珠浦) 월영대(月影臺  - 주세붕(周世鵬, 1495~1554. 조선중기 문신, 학자)

 

바닷가 층대는 경치 가장 기이한 곳    海上層臺景最奇(해상층대경최기)

물결에 비치는 달은 몇 번이나 차고 이지러졌을까    照波明月幾盈虧(조파명월기영휴)

꼭 최고운의 시 다시 읊을 것이 없으니     不須更詠孤雲句(불수경영고운구)

고금 훌륭한 인재 각기 한 때인 것을     今古賢才各一時(금고현재각일시)

 

 

월영대 비각

월영대(月影臺    -이황(李滉,1501~1570, 조선중기 문신. 학자

 

늙은 나무 기이한 바위 푸른 바닷가    老樹奇巖碧海堧(노수기암벽해연)

고운이 노닌 자취 모두 연기 되고 말아    孤雲遊跡總成烟(고운유적총성연)

이제 다만 높은 대에 달만이 머물러서    只今唯有高臺月(지금유유고대월)

그 정신 담아내어 내게 전해 주누나    留得精神向我傳(유득정신향아전)

 

마산 구복리

월영대(月影臺)   - 이식(李植, 1584~1647, 조선 중기 문신)

 

협곡의 물 쏟아져 곧장 대해(大海)로    峽拆輸溟漲(협탁수명창)

거울 같은 물속에 천 산의 봉우리 담겨 있네    千峯鏡裏來(천봉경리래)

고운이 머물던 곳 찾을 길 없고    孤雲無處所(고운무처소)

누대의 밝은 달만 예전처럼 비춰 주네    明月只亭臺(명월지정대)

 

멀고 먼 그 옛날 신선은 가셨지만    劫盡神仙死(겁진신선사)

온 천하에 전해지는 그분의 명성    名垂宇宙開(명수우주개)

평소 남기신 글 사모하여 왔는지라    平生慕遺響(평생모유향)

자취 어루만지며 서성이노라    撫跡一徘徊(무적일배회)

 

월영대기(月影臺記)   - 허목(許穆,1595~1682, 조선 중기 문신)

 

월영대는 창원부(昌原府) 관아에서 서쪽으로 30리 지점

합포(合浦)의 옛 보루(堡壘) 옆에 있는데,

망망대해를 마주하여 서쪽 언덕은 바다에 막혀 있고 동쪽으로는

웅산( 진해 불모산 옆에 있는산)을 바라보고 있다.

매월 기망(旣望. 음력16)의 초저녁에 밀물이 들어올 때 월영대에 올라

달그림자를 구경하니, 달이 바다에서 떠올라 산에 가려 그림자를 이룬다.

달그림자는 바다에 있다가 달이 9738천 척() 남짓 올라가

극에 달하여 달이 산을 벗어나면 바다에 비친 그림자가 없어진다.

내가 일찍이 동해 밖 수평선에서 달이 떠오르는 것을 바라본 적이 있는데,

달이 뜰 때에 그림자가 없었고 바다 물결이 모두 밝아

이곳의 경치와 달랐으며 형상도 모두 기이하였다.

신라의 역사를 보니 진성여왕 때 최치원처음에 당 희종(唐僖宗)

섬기다가 천하가 혼란해질 것을 알고 당나라를 떠나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신라 역시 정국이 나빠져 마침내 세상을 버리고 은둔하였다.

이에 닭을 잡고 오리를 친다(先操鷄後搏鴨. 왕건이 먼저 신라를 정복하고

뒤에 압록강을 취하게 됨을 예언)는 말이 있었고,

삼국사기 최치원전(崔致遠傳)에 최치원이 월영대에서 노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창원 지방에 전해지는 최학사(崔學士)의 고사를 말한 야담이 있는데,

모두 괴이하고 황당하여 믿을 것이 못 된다.

또 창원의 풍속은 음사(淫祀)를 숭상하여 월영대 위에서 무당들이 날마다 북을 치고

종잇조각을 걸어 놓고서 기도드리고 제사하는데, 때때로 신령한 효험을 얻는다고 한다.

하지만 바다 귀퉁이라서 입증할 만한 문헌이 없다.

그 옆 바닷가에는 고운대(孤雲臺)가 있는데

후세의 호사가(好事家)들이 이렇게 이름 붙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