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루는 경남 밀양시 낙동강변에 있는 누정으로 보물 제147호이다.
밀양영남루(密陽嶺南樓) 앞에는 아랑의 전설이 깃든 대밭이 있다.
문헌에 따르면 영남루는 신라 법흥왕 때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을 지었다가
고려 현종 때 절을 없애고 종각이었던 금벽루(金壁樓)만 남겨 두었던 것을
고려 예종 때 영남루를 지었으며,
1366년 공민왕 14년에 밀양부사 김주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 뒤 조선조에 들어와 1460년(세조 6년)에 부사 강숙경이 누각의 규모를 키워 중건하였고
1542년 중종 37년에 부사 박세후가 다시 중건하였다.
1460년(세조 6)에 중수하면서 규모를 크게 넓혔으며, 선조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37년(인조 15) 다시 지었고, 1842년 다시 실화로 소실된것을
마지막으로 1844년(헌종 10) 부사 이인재가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체적으로 부재도 크고 기둥 간격도 넓으며 중층(重層)으로 되어
우리 나라 건축 중에서는 크고 우람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동서 좌우에는 다시 각각 3간의 익루인 능파각과 침류각이 달려 있다.
지붕이 여러 단으로 낮아지면서 연결되어 독특한 외관을 구성한다.
빼어난 경관과 건축미가 조화를 이룬 건물로 조선후기 건물의 특색을 잘 반영한다.
조선시대에는 밀양도호부 객사로써 귀한 손님을 접대하거나 잔치를 베풀던 장소로
또한 주변 경치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던 건물이다.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한국의 3대 누각으로 꼽힌다
동국여지승람에 이 건물을 노래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여러 문인들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영남루(嶺南樓)
목은 이색 (牧隱 李穡,1328~1396,고려말 학자)
영남루 아래 큰 물 비껴 흐르고 嶺南樓下大川橫(영남루하대천횡)
가을 달 봄바람이 태평이로세. 秋月春風屬太平(추월춘풍속태평)
문득 눈앞에 삼삼한 은어 忽得銀魚森在眼(홀득은어삼재안)
사문(儒學, 士林)의 웃음소리 귀에 들리는 듯. 斯文笑語可聞聲(사문소어가문성)
영남루에서 차운하다(次韻嶺南樓)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1431~1492,조선전기 문신)
올라간 것이 마침 늦은 봄을 만났는데 登臨正値浴沂天(등림정치욕기천)
낯 스치는 바람이 기둥 기댄 앞에서 나오네. 灑面風生倚柱前(쇄면풍생기주전)
남방의 산천들은 모두 바다에서 다하고 南服山川輸海上(남복산천수해상)
팔창의 관현악 소리는 구름 가에 들리어라. 八窓絲竹鬧雲邊(팔창사죽료운변)
들소는 코만 내민 채 관선 나루를 횡단하고 野牛浮鼻橫官渡(야우부비횡간도)
백로는 새끼 데리고 저녁연기를 가르누나. 巢鷺將雛割暝煙(소로장추할명연)
이제야 믿노니 내 행차 적막하지 않음은 方信吾行不牢落(방신오행불뢰락)
늘 모친 뵙는 틈에 빈연에 참여한 때문일세. 每因省母忝賓筵(매인성모첨빈연)
영남루(嶺南樓)
퇴계 이황(퇴계 이황,1501~1570,조선시대 문신,학자)
누각은 영해 하늘 우뚝이 솟아 있고 樓觀危臨嶺海天(누관위림영해천)
좋은 시절 국화 앞에 객은 찾아왔도다. 客來佳節菊花前(객래가절국화전)
소상강 언덕인가 푸른 숲에 구름 걷히고 雲收湘岸靑楓外(운수상안청풍외)
형산 남쪽 흰 기러기 물은 떨어지누나. 水落衡陽白雁邊(수륙형양백안변)
비단 장막 광한전의 달을 싸고도는데 錦帳圍將廣寒月(금장위장광한월)
옥퉁소 소리 태청의 연기 속에 들어가네. 玉簫吹入太淸烟(옥소취입태청연)
평생에 진실로 시인의 흥이 있어 平生儘有騷人興(평생진유소인흥)
술두루미 앞에서 비단 자리에 춤추노라. 猶向尊前踏綺筵(유향존전답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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