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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세계문화유산.유적

여주 효종대왕릉(녕릉)

by 안천 조각환 2020. 3. 12.

효종대왕릉(녕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과 왕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래·위로 만든 동원상하릉으로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주시 능성동에 자리한 세종대왕릉(영릉)과 효종대왕릉은 사적 제195호이다.

특히 조선왕릉은 종묘(1995년) 및 창덕궁(1997년)에 이어 수도권은 물론

영월의 장릉까지 조선왕릉 40기 전체(북한소재 2기 제외)가

2009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효종대왕(재위 1649~1659)은 1659년 5월 4일에 승하하여

원래 릉은 구리(九里)에 있었는데 1673년(헌종 14년)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 왕비릉엔 둘러쳐진 곡장이 없고 왕릉에는 곡장이 있다.

영릉은 다만 쌍릉이면서 앞뒤로 엇비슷하게 위치를 잡고 있어

지형과 상관 없이 애당초 나란히 놓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의 석물들은 똑같이 갖춰져 있는데,

배치와 양식은 조선전기 '국조오례의'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홍살문

 

 

돌길 바로 앞이 금천교(禁川橋)이고 중앙건물이 정자각(丁字閣)이며

왼쪽건물이 수라간(水刺間) 오른쪽 건물은 수복방(守僕房)이다

 

 

왼쪽이 효종릉이고 오른쪽이 인선왕후릉이다

 

 

 

 

효종대왕릉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1619년(광해군 11) 5월 22일 태어나

1626년(인조 4) 봉림대군에 봉해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로 8년간이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

그 후 풀려 나와서 1646년(인조 23) 소현 세자가 변사하자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고 1649년(인조 27) 5월 13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즉위 후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화폐를 널리 보급하였다.

조선왕조가 당한 굴욕을 씻고자 청나라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 4일 재위 10년 만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봉분과 석조물

 

 

인선왕후릉

 

 

효종대왕릉 비각

 

 

조선국 효종대왕녕릉(朝鮮國 孝宗大王寧陵) 비

 

 

입구의 정자각

 

 

정자각 내부

 

 

효종대왕릉 재실(보물 제1532호)

녕릉의 재실은 조선왕릉 재실 중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겨져 있어

보물 제1532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재실 안에 심어진 수령 300년의 회양목은 키가 크고

나무의 모양이 양호한 노거수로 평가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우물

 

 

효종대왕릉 재실에서 세종대왕릉으로 넘어 가는 솔밭길

 

 

세종대왕 역사문화관 입구

 

 

세종대왕릉은 복원정비공사로 인하여

2019년 8월 부터 2020년 말까지 관람이 불가하다고 하여

부득이 전에 가본 기억만 드듬어 보았으며

올해(2020년) 5월경에는 개방예정이라 한다.

 

 

사진으로 보는 세종대왕릉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 안에 있는 감고당(感古堂)

 

이 감고당은 인현왕후가 폐위되어 구금생활을 하고,

명성황후가 간택되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보내던 안채이다.

원래 종로구 안국동에 있던 건물인데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 

 

 

민속마을

 

효종왕릉을 둘러보고 오는길에 명성황후생가를 들렀으나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휴관중이라 관람하지 못하고 멀리서만 보고 다음을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