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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梅溪 曺偉 先生

매계 조위선생 한시~(70)신차소가 옥당으로 돌아감을 축하하며

by 안천 조각환 2020. 5. 24.

매계 조위선생은 "신차소가 옥당으로 다시 돌아가는것을

축하한다는 시" 를 지어 그에게 보내주어 축하하였다.

당시에는 자리를 옮기거나 영전할 때에 친한 사람끼리 시를 지어

역마를 통해 서로 보내주거나 받고 하는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이 시는 1491년 신종호가 대사헌으로 있을 당시

북쪽 오랑캐 침입 사건에 관한 어전회의 중에 영의정을 모욕한 죄로

파면되어 마음고생을 하다가 뒤 다시 등용되어 입궐하였는데,

이 때 매계선생은 충청도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을때, 축하시를 지어 보내준것 같다.

 

천연기념물 제199호 황새

신차소가 다시 옥당으로 돌아가는 것을 축하하며

(賀申次韶復入玉堂)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손에 야광주를 들고 규성에서 내려와

인간 세상의 빛나는 신선이 되었네.

붓끝의 무지개는 태양을 나란히 꿰고

가슴속에 창해가 하늘에 거꾸로 매달았네.

 

手携明月下奎躔(수휴명월하규전)

來作人間赫世仙(래작인간혁세선)

筆底虹霓橫貫日(필저홍예횡관일)

胸中滄海倒連天(흉중창해도연천)

 

난초와 해초를 엮어 가득히 걸고

금옥의 가루가 편액마다 가득하리.

봉래산 최고봉에 조용히 올라

깊은 밤 궁궐에서 금빛 촛대를 마주 하겠지.

 

紉蘭綴蕙應盈佩(인난철혜응영패)

屑玉霏金動滿篇(설옥비금동만편)

穩上逢萊崔高處(온상봉래최고처)

夜深宮燭對金蓮(야심궁촉대금연)

 

재상집 재주 있는 자제 시 짓기에 능란해

모두들 문장에 봉모가 있다고 말하네.

백옥당 안에서 한가로이 화초 구경하며

자미화 아래서 취기에 붓을 놀렸지.

 

相門才子壇風騷(상문재자단풍소)

共說文章有鳳毛(공설문장유봉모)

白玉堂中閑視草(백옥당중한시초)

紫微花下醉揮毫(자미화하취휘호)

 

거듭 장원급제하여 명성을 날리고

대궐의 섬돌 위를 걸으니. 보무도 당당하네.

웅혼한 문장은 바다같이 드넓어

한(漢)의 왕포를 손꼽을 필요도 없다네.

 

再魁金榜聲名重(재괴금방성명중)

獨對丹墀步武高(독대단지보무고)

磊落詞源如陸海(뢰락사원여육해)

漢庭不必數王褒(한정부필수왕포)

 

지방은 아득히 멀고 세월은 오래 흘렀는데

사 년여 지방 벼슬살이에 얽매였네.

아아! 나의 치아와 머리가 헛되이 먼저 늙어 감이여

그대의 재명을 바로 헤아릴 수 없음이 부러웠다네.

 

嶺海蒼茫歲月長(영해창망세월장)

四年塵土綰銅章(사년진토관동장)

嗟余齒髮徒先老(차여치발도선노)

羡子才名正叵量(이자재명정파량)

 

마음은 공문서에 흐려져 시 짓기 마저 포기하고

꿈속에서나마 자연에 돌아와 동헌에 누웠다네.

그대를 생각하여 강남소식 전하려 하니

역로의 매화는 나무마다 향기롭다네.

 

心溷簿書抛綠綺(심혼부서포록기)

夢歸泉石臥黃堂(몽귀천석와황당)

思君欲寄江南信(사군욕기강남신)

驛路梅花樹樹香(역로매화수수향)

 

 

여기에 나오는 신차소(申次韶)는 신종호(申從濩,1456~1497)의 자이다.

신종호의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호는 삼괴당(三魁堂)이다.

신종호의 할아버지는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이고,

아버지는 신주(申澍)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이다.

1474(성종 5) 약관으로 성균진사시에 장원을 하고,

1480년 식년문과에 다시 장원을 하였다.

1486년 부응교로 있을 때 또다시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과거제도가 생긴 이후 세 번이나 장원을 한 것은 처음이라며 칭송이 자자하였다.

1487년 홍문관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부제학이 되었으며,

이듬해 동부승지가 된 뒤 예조참의·좌승지·우승지·도승지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491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 파면되었으나, 얼마 뒤 다시 등용되어

도승지·동지중추부사를 거쳐, 병조·예조·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494년 경기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이듬해 중앙으로 들어와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있으면서 성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1496(연산군 2) 병환을 무릅쓰고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인 1497년에 돌아오던 중에 개성에서 죽었다.

관후(寬厚: 마음이 너그럽고 후덕함.)한 장자의 풍모를 지녔으며,

문장과 시·글씨에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