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계 조위선생이 28세되던 1481년(성종12년) 3월,
원접사(遠接使)인 강희맹(姜希孟)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그 해 8월, 반송사(伴送使)종사관으로 사명을 받고 관서(關西)지방에 갔다가
황해도를 지나며 변경고을의 농사를 두루 살폈다.
12월, 금산(김천)으로 귀성했다가, 왕명을 받들어 두시서(杜詩序)를 지어 올렸다.
1482년(성종13년) 4월에 임금이 전지(傳旨)하기를 조위(曺偉)와
김흔(金訢)은 둘 다 진용(進用)한 자이니, “한 계급을 올려주라” 고 명하셨다.
7월에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는데 8월에 사직서를 올리고 귀근하였다.
성종은 시강원(侍講院)을 설치하고 조위를 문학(文學)에 임명하였으며,
10월에 명나라 사신이 돌아가자, 반송사 종사관이 되었다.
이 때 전당(錢塘)사람인 갈귀(葛貴)가 칙사(勅使)로 따라 왔는데 문장에 조예가 있었다.
성종은 조위와 신종호(申從濩)에게 명하여 갈귀를 접대하라고 하였는데,
그의 학문을 묻고, 이어 중구의 일을 묻자, 갈귀가
조위의 재주와 학식에 탄복하고 유자(儒者)의 기상이 있다고 칭송했다.
이듬해인 1484년(성종15년) 2월, 선생은 명나라에서 돌아왔다.
1484년 4월, 손소(孫昭)의 치전관(致奠官)이 되어 금산으로 귀성했다가
선산(善山)을 길 잡아 영천, 안강(손소고택),경주, 양산, 밀양을 거쳐
다시 영산과 창녕의 조상묘소에 간단한 제물로 제를 올리고 돌아왔으며.
5월에 응교(應敎)에 임명되었다.
손소고택은 손소가 살아 있을때인 1484년 이전에 지은 집으로
조위 선생이 치전관으로 갔을때인 426년 전에도
서백당 사랑채 어딘가에서 조문을 하고 돌아 왔을 유서깊은 건물이다.
그 해 8월에 걸군(乞郡)하여 함양군수에 임명되었다.
그가 함양을 다스리는데, 어짊과 너그러움, 간결하고 검소한 것으로 근본을 삼았으며,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기르는 것을 의무로 여겼다.
9월에는 백부상을 당하여 분곡(奔哭)하고, 12월, 장례를 마치고 관아로 돌아왔다.
선생이 32세때인 1485년(성종16년) 성종의 명령으로 세초시(歲抄詩)를 지어 올리자,
칭찬을 하고 부모님께 쌀과 콩을 하사하였으며. 또 하서(下書)하여 포상하였다,
1489년(성종20년) 선생은 군청에 근무하며 정무를 본 6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며,
귀근의 예와 봉양의 물품을 준비하는데, 그 정성을 다하였다.
매계선생 아버지 울진 현령 조계문의 묘
1489년 2월, 아버지(曺繼門)가 돌아가시자,
임금께서 부의로 쌀과 콩, 기름, 꿀 등을 하사하였다.
5월, 황간현(현 대항면) 마암산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선생이 38세가 되는 1491년 2월, 3년 상을 마치고 4월에 담사를 지냈다.
같은해인 1491년 5월, 검상(檢詳)에 임명되어 상경하였다.
장령(掌令)으로 옮겼다가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12월, 금산으로 돌아와서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에 돌을 모아 계단을 만들고, 꽃을 심어서 그윽한 운치가 나도록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곳을 “매계동”이라고 하였다.
1492년(성종23년) 도승지(都承旨)로 옮겼으며,
이 해 가을 점필재가 돌아가시자 가서 곡을 하였다.
선생이 40세이던 1493년(성종24년) 6월,
가선대부(嘉善大夫),호조참판(戶曹參判)에 임명되었다.
임금이 조위에게 점필재의 시문(詩文)을 모아 책으로 엮으라고 명하였다.
1492년 8월, 정조사(正朝使)로 임명되었으나,
어버이가 연로함을 이유로 장계를 올려 관직을 내놓고 물러났다.
어머니의 수연(壽宴)을 베풀고 금산(김천 봉계)으로 돌아와 살았다.
그 해 9월, 선영에 분황제(焚黃祭)를 올렸으며, 아버지의 묘 앞에 표석을 세우고,
비석의 뒤에 관력과 생년월일을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또한 전비(前妣)의 묘에도 비석을 세웠다.
점필재의 신도비명을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에게 청하였다.
선생은 작은 시냇가에 초당을 지으며, 계단을 쌓고 소나무와 국화,
매화, 대나무 등을 심고서 이름을 짓기를 “매계당”이라고 이름 했다.
홍 허백(귀달)이 기문을 지어 그곳을 빛냈다.
1494년(성종25년) 선생이 41세때 충청감사에 임명되었다.
성색(聲色)을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온 도내(道內)가 화합하였다.
12월, 순행길에 황간에 와서 마암산 선영에 성묘하였다.
이달에 성종대왕이 돌아가시자, 반염(攀髥)하지 못함을 원통하게 여기고
10편의 절구시를 써서 애모(哀慕)하는 마음을 붙였다.
선생이 42세되는 1495년(연산군 1년) 4월, 체직(遞職)되어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임명되어 서울에 도착하자, 대사성(大司成)으로 옮겨졌다.
7월에 금산으로 돌아오자,
같은 달 23일에 전라감사로 임명되어, 8월에 부임하였다.
매계선생 어머니 정부인 문화류씨 묘
같은해인 1495년 10월에 어머니가 금산에서 돌아 가시자,
문상하는데, 너무 슬퍼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묘지를 홍 허백에게 청하여 12월에 마암산 축좌(丑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루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1496년(연산군 2년) 4월, 어머니의 묘 앞에 표석을 세웠다.
1497년(연산군 3년) 선생이 44세되는해 10월, 3년상을 마쳤다.
12월, 담례(潭禮)를 지내고 창녕과 영산에 가서 조상의 묘소에 간단한 제물로
제를 올렸으며, 밀양에 가서 점필재 선생의 묘에 제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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