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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梅溪 曺偉 先生

매계 조위선생의 생애(하)

by 안천 조각환 2020. 6. 3.

매계 조위선생이 45세되던 1498(연산군 4) 2,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어 성절사(聖節使)가 되었다.

4월에 출발하는데, 홍 허백(귀달)이 송서(送序)를 지어 송별하였으며,

서제인 조 신(曺)이 수행하였다.

5월에 압록강을 건너서 6 8일 북경에 도착하였다.

 

*성절사란 조선시대에 명나라 또는 청나라의 황제나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던 사절 또는 그 사신을 말한다.

 

중국 천안문

 

근정문

그 해 7월에 유자광(柳子光)이 사옥(史獄)을 일으키고

점필재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반역을 꾀할 뜻이 있다고 하였다.

연산군은 평상시에도 선비들에게 원한을 갖고 있었는데,

참언(讒言)을 듣고는 크게 기뻐하며 점필재를 대역죄인으로 논죄하고,

즉시 부관참시(副棺斬屍)하고, 김일손(金馹孫)등을 극형에 처하도록 명령하니,

한 시대의 명사들이 모두 당고(黨錮)의 화를 입었다.

 

*당고(黨錮)란 어떤 일정한 무리에 딸린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벌하는 일.

 

압록강

그때 선생은 중국에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연산군은 압록강을 건너오자마자 처형하라고 명령하였다.

1498년 815, 선생이 요동(遼東)에 도착하여 비로소 그 소식을 들었다.

8월 26, 압록강에 도착하자 멀리 금오랑(金吾郞)이 와서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일행이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다만 선생은 얼굴빛도 변하지 않았으며,

강을 건너자 형벌이 바뀌어 붙잡아 오라는 명으로 바뀌었다.

 

*금오랑 : 조선 시대, 의금부에 딸린 도사(都事)를 달리 이르던 말

경복궁 경회루

99, 서울에 들어와 하옥되었고, 같은 달 17일에 죄가 판결이 났으며,

같은 달인 1498년 9월 20일 의주로 귀양을 갔다.

 선생이 46세되는 1499(연산군 5)여름,

유배지에 작은 정자를 지어서 규정(葵亭) 이라고 이름 짖고,

그 기문을 지어서 임금을 그리워하는 정성을 붙였다.

 

1499(연산군 5) 6월 7일 여름에 날씨가 가문데도 천둥벼락이

궐문밖 사람에게 치자, 원통하게 옥살이를 하는 사람을 풀어주라고 명령하고,

귀양 간 신하들을 이배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순천 선암사 계곡

매계선생은 47세가 되던 1500년(연산군 6년) 5월

의주에서 순천부로 이배되어 서문 밖에서 우거(寓居)하였다.

이때 한훤당 김굉필도 희천에서 이곳으로 이배되어 서로 도의(道義)를 강론했다.

48세가 되던 1501(연산군 7),

순천부의 서쪽에 시내가 있었는데 이름이 옥천이라고 했다.

수석이 청아하고 수려하며, 오래된 고목들이 앙상하게 하늘을 가리고 있으며,

선생이 살고 있는 집과도 거리가 매우 가까웠다.

 

임청대 비

마침 돌을 쌓아 누대를 만들고, “임청이라고 이름을 짖고

유유자적하는 장소로 삼았으며, 또 기문을 지어서 그 뜻을 붙였다.

또한 한훤당(寒喧堂) 김굉필선생도 일찍이 오고가며 학문을 논하였다.

세월은 흘러 선생이 49세가 되던 1502(연산군 8),

선생은 폐적(廢嫡)된 이후 학문에만 전념하느라 거의 침식을 잊었으며,

오직 간신이 나라를 그르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만 하였다.

 

문장공 매계 조위선생 묘소

선생이 50세가 되던 1503(연산군 9나랏일이 날로 잘못되어

감을 알고 괴로워하다가, 병이 생겨 그해 1126일 유배지에서 작고했다.

한훤당 김굉필선생이 제문을 짓고 고을 사람들을 이끌고 예를 갖추어 상을 치렀다.

그때 동생인 적암 신()은 금산(김천)에 있었는데,

선생의 병이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갔으나 이미 염을 마친 뒤였다.

고향으로 운구하고, 묘지(墓誌)를 홍 허백(귀달)에게 청하였다.

다음 해(1504) 3월, 마암산 선산언덕의 동쪽 봉우리에 장사를 지냈다.

선생의 정실부인과 첩은 모두 자식이 있었으나, 모두 요절하여,

()부인이 종제(從弟)인 군수(郡守) ()의 아들 사우(士虞)를 아들로 삼았다.

 

*매계선생이 작고하였을 때 자녀도 없고 조문하는 이도 없었다.

이 소식을 듣자 조광조는 조위를 애도하는 시를 남기었다.

 

"매계가 먼저 가시고 한훤당이 조사(弔辭)를 지으시니

야사에 올해는 슬픔도 가득하다고 하리라.

도를 찾는 일 양지바른 강가의 어린 아이처럼

서릿발 가득한 하늘에서 누런 꽃 보는 것 같구나."

 

창덕궁 인정전

이듬해인 1504년 9, 다시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선생은 전죄가 추록되고 가산(家産)이 적몰(籍沒) 되었으며,

11월에는 화가 구천에까지 미쳐 마침내 선생의 시신이 다시

아버지의 묘 앞에 3일간 놓여지는 참혹한 화를 입었다.

이 갑자사화로 한훤당 김굉필선생도 참형이 내려졌으며

점필재 김종직선생도 부관참시를 당하는 참화를 당하였다.

 

연산군은 2대 사화(士禍) 이래로 더욱 그 마음이 사치해져서,

자기의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죽이거나

혹은 멀리 유배 보내 언론의 자유를 막은 다음,

매일 주색과 오락을 생활로 삼아 자기 하고 싶은 바를 다하였다.

 

1506(중종 1) 9월 2일 드디어 중종반정이 일어나

신수근· 신수영 형제를 비롯하여 임사홍(任士洪) 등 간신배를 철퇴로 박살내고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전동(田同)· 김효손(金孝孫)· 강응(姜凝)·

심금종(沈今種) 등을 모조리 잡아내 목베어 군문에 매달았다

 

근정전 용상

1506(중종 1) 중종이 나라를 다스려 태평하게 한 지 2년이 지난

1507년(정묘), 원통한 죄를 거슬러 올라가 풀어주고,

매계 조위선생을 가정대부(嘉靖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경연춘추관성균관사(經筵春秋館成均館事)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홍문관(弘文館) 제학(提學), 예문관(藝文官) 제학(提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에 추증하였으며,

자손에게 녹용(錄用)하도록 명하였다.

 

매계 조위선생 영정

1518(중종13) ()부인이 조신(曺)에게 명하여 표석을 세우라고 명하였다.

매계선생은 평생토록 자신을 낮추고 실력을 남에게 들어내지 않는 것을

스스로의 경계로 삼았는데,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도 못하고 먼 변방으로 내침을 당했으니 실로 나의 죄가 크다.

내가 죽거든 절대로 나의 행적을 선양하지 말고,

다만 묘석 (墓石)에 관위(官位)와 성명만 쓰라.” 고 하였다.

 

제일 아래에 매계선생 부인인 평산신씨 묘소, 그 뒤 차례대로 매계선생과 부친인 울진현령 조계문의 묘소

1527(중종22) 210, ()부인이 세상을 하직하니,

4월에 매계선생의 묘소 아래에 장사를 지냈다.

부인은 시부모를 섬기는데 예를 다하였으며,

남편을 받드는 데에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일상의 일을 처리하거나 임시변통을 할 때에도

마땅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실로 부인 가운데 군자(君子)이다.

 

순천 옥천서원(이황 친필현액)

선생이 떠나신 후 24년이 지난 1527년 이행등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면서

선생의 주옥같은 시문, 기문등을 21편이나 수록하였으며

동문선에도 많은 시문이 수록되어 있어 선생의 시문을 일부나마 엿볼수 있게 하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신 후 60여년이 지난 1564년 고봉 기대승이 순천 유생들의

주창에 따라 순천에 옥천서원을 창건하고 선생과 한훤당을 제정하였다.

이때 퇴계 이황이 서원명을 친필로써 현액하였으며

고봉은 이 서원의 연원에 관하여 기문을 지어 봉안하였다.

 

 

순천 임청대

다음해 순천태수 구암 이정은, 선생의 얼이 담긴 임청태진에 대를 다시 수축하고

그곳에 비를 세워 선현의 유허지임을 추모하는 곳으로 하였다.

이 임청대라는 비의 글씨역시 퇴계 친필로 돼있다.

한편 1648년 김산(김천)의 유림들도 경렴서원을 창건하고 매계 조위 선생과

점필제 김종직, 문혜공 최선문, 평정공 이약동, 남정 김시창등을 제정하였다.

 

영동 매곡면 송계서원 유허비

1664년(현종 5) 영동군에서도 지방유림의 공의로 매곡면 수원리에

송계서원을 창건하고 매계 조위선생과 송당 박영, 남정 김시창, 오촌 박응훈등

사(四)선생을 봉안하였으며, 봉안문은 우암 송시열선생이 썼다.

1726년에 ‘송계(松溪)’라는 사액을 받았으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고, 서원터에 유허비와 비각을 설립하여

매년 음력 3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선정전 용상

선생 사후 205년이 되는 1708년에 순천의 유생 수백명이

선생의 관직을 더 높히고 시호를 내려 줄 것을 청하니

숙종께서 "매계의 학문과 도덕이 참으로 크고 높은데

죽어서 화가 무덤에까지 미치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하고

증직하여, 이조판서 겸 지연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빈객오철자 총부도총관을 내리고

자헌대부로 가자 하였으며, 시호를 내려 문장공(文莊公)이라 하였다.

 

매계선생은 50평생을 출사(出仕)의 여가에 한묵(翰墨)과

함께 살다간 문인으로 수많은 시와, 학문과 도를 논한 글을 남겼으나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가산이 적몰당할 떄 모두 일실되었으며

남은 저서로는 동생인 조신(曺伸)에 의하여 찬차(撰次)된

매계집(梅溪集)과 미성고(未成藁) 유고(遺稿)인 매계총화(梅溪叢話),

우나라라 최초의 유배가사인 만분가(萬憤歌) 등이 있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