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계 조위선생은 1454년 7월 10일 김천 봉계에서 출생하여
1503년 11월 26일 유배지인 순천에서 50세를 일기로 작고하기까지
참으로 파란만장한 영욕의 삶을 살다 가신 분이다.
선생의 생애를 상(1~27세). 중(28~44세). 하(45~51세) 세편으로 나누어
감히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매계(梅溪) 조위선생(曺偉先生)은 1454년 7월 10일 김천 봉산면 인의동(봉계리)
극락산 동편기슭 율수재(구거)에서 태어 났으며, 어릴때의 이름은 오룡(五龍)이었다.
선생은 5세가 되면서 말을 배우자마자 곧 글자를 알았으며
7세때에 이미 시를 지을줄 알았고, 학업이 나날이 발전하여 모두 크게 될
인물이라 하였으며. 이해에 아버지인 조계문(曺繼門)은 현풍 현감에 제수되었다.
1461년 선생이 8세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현풍의 관아에서 생활하였는데,
오직 강독하는 데만 몰두하고 화려한 것에 마음을 허비하지 않았다.
선생의 나이 10세되던 1463년 6월에 아버지가 현풍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게되자 가을에 자형(姊兄)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에게 가서 배웠다.
참고로 김종직은 1451년(문종 1) 울진현령 조계문(曺繼門)의 딸이며
이후 김종직의 문인이된 조위(曺偉)의 누나와 결혼했다.
김종직의 아버지인 김숙자선생은 고령과 개령, 성주 등지에서
수령과 교수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김종직도 결혼하게된다.
11세때인 1464년 가을에 아버지가 선생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당숙인 충간공 조석문(忠簡公,曺錫文)에께 질품(質稟)하니,
충간공이 보고서 크게 될 인물이라고 여기고 집안에 머물게 하고
친히 소학을 가르쳤으며, 여기에서 독서를 하며
경전의 이치를 따져서 물으며 학문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선생의 나이 14세이던 1467년(세조13년) 10월,
아버지가 울진(蔚珍)현령으로 부임하자 수행하였으며
12월에 봉계집으로 돌아왔다가 어머니를 모시고 울진관아로 다시갔다.
선생의 나이 17세가 되던 1470년(성종원년) 3월에,
강릉에서 독서를 하였는데, 당시의 강릉부사는 鐵城(철성) 박식(朴殖)이었다.
8월에 울진으로 귀성했다가 다시 강릉을 경유하여 서울로 올라갔다.
선생이 18세가 되던 1471년 8월, 생원(生員), 진사(進士) 초시(初試)를
모두 수석으로 급제했으며, 이듬해 정월, 사마시(司馬試)와 복시(覆試)에
모두 합격하여 창녕군(충간공)집에 방(榜)을 내붙였다.
금산(김천)에 가서 영예롭게 선영을 소분하고, 울진에 가서 축하연을 베풀었다.
이어 창녕(昌寧)과 영산(靈山)에 있는 선산을 성묘하고,
점필재 김종직이 군수로 재임중인 함양(咸陽)에 가서 강론하고
질문하는데 아는 것이 많아 막힌 데가 없었다.
그해 6월, 아버지가 울진에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선생이 과거에 급제한 이후로 다시는 출사(出仕)에 뜻을 두지 않았다.
선생이 20세이던 1473년, 반궁(泮宮)에 다니면서 관시(館試)에 합격하였다.
이듬해(1474년)봄에 실시한 식년시(式年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창녕군(충간공 조석문)집에 방(榜)이 나붙었다.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임명되었으며.
그 해 겨울, 평산신씨(申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선생의 나이 22세이던 1475년(성종 6년) 정월 금산으로 귀근하여
조모인 정씨(鄭氏) 부인 상(喪)에 슬픔을 다하고 3월 상경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부산을 유람하다 한림연(翰林宴)에서 금지된 고기와
기생과 악공들이 곡을 연주한 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고향인 금산으로 부처되어 돌아왔다.
12월, 조모를 금산 방목산(放牧山)의 북동쪽 언덕에
장사지내고. 서제인 신(伸)과 능여사(能如寺)에서 독서를 하였다.
선생이 23세때인 이듬해 6월, 성종임금은 조위선생과 채수(蔡壽), 권건(權健),
허침(許琛), 유호인(兪好仁), 양희지(楊熙止)등 6명을 선발하여
장의사(藏義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명하였다.
선생의 나이 24세되던 1477년 정월에 홍문원(弘文院) 정자 겸
독서당(讀書堂) 봉교(奉敎)에 임명되어 독서당기(讀書堂記)를 찬진(撰進)했다.
봄에 여러 친구들과 송도(松都)를 유람할 것을 약속하고
서로 주고받은 시를 모아 송도록(松都錄)을 간행하였다.
이해 8월, 충간공(忠簡公)이 작고하자, 공이 가정판관(加定判官)이 되어
10월에 장단(長湍)에 장사 지내고, 독서당으로 돌아왔다.
1478년(성종 9년) 3월, 홍문관(弘文館)저작(著作)으로 승진하여
다시 본관(本館)에 근무하도록 명을 받았다.
4월에 금산(김천)에 귀근(歸覲)하였다가 6월에 다시 홍문관으로 돌아와
임사홍(任士洪)을 논박(論駁)하였으며, 7월에 박사로 승진하였다.
1479년(성종10년) 2월에 부모를 영예롭게 하기위한 영친연(榮親宴)을 베풀었다.
5월에는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하였으며,
9월, 영안도(永安道) 경차관(敬差官)으로 임명되어 길을 떠났다.
1480년(성종11년) 선생의 나이 27세이던 2월, 영안도에서 돌아왔다.
8월, 포쇄관(曝曬官, 사고에 보관된 서적을 점검하고 바람에 쐬고 볕에 말리는
일을 맡은 관리)으로 임명되어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와 본가에 귀근하고,
성주, 창녕과 영산을 거치며 조상의 묘소에 술과 과일 등 제물을 올려 제사를 지내고,
밀양으로 점필재 선생을 찾아뵙고, 다시 성주로 돌아와서 포쇄하였다.
10월에 다시 가족을 이끌고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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