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암(適菴) 조신(曺伸,1454.8.15.~1529)은 매계 조위선생의 동생으로
자는 숙분(叔奮)이요, 호는 적암(適庵), 시호는 효강공(孝康公)이다.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조계문(曺繼門)이며. 점필재 김종직이 그의 매형이다.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7.10.~1503)는 조신(曺伸)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난 형이다.
매계 조위는 조계문(曺繼門)의 적실(본부인)에서 태어났으며,
적암 조신은 측실(첩)에서 태어났다.
당시 조선은 적자(적실소생)와 서자(측실소생)의 차별이 엄중하여
서자로 태어나면 교육은 물론 벼슬길에도 나가지 못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두 형제는 어릴 때부터 한집에서 태어나 같이 자라났으며
교육은 물론 벼슬길에 올라서도, 또 순행을 할 때에도
평생을 그림자처럼 함께하며 우애 깊게 지냈다.
적암 조신은 어려서부터 형인 조위(曺偉)와 함께 시문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고,
김종직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우고 문학적 재능을 길렀다.
그는 중국어·일본어에 능하였으므로 자신의 신분과 재능을 살려 역관의 길을 걸었다.
조신은 김종직, 김안국(金安國), 남효온(南孝溫), 정여창(鄭汝昌), 박상(朴祥), 이행(李荇),
권민수(權敏手), 이항(李恒), 홍언필(洪彦弼) 등 당대의 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비록 서얼 출신이지만, 빼어난 문장과 탁월한 외국어 실력으로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외교 문서 전문가로 활동하였으며, 이에 성종은
여러 차례 조신을 불러 시를 짓게 하고 학문을 논하면서 상을 주었다.
1479년(성종 10)에 내시 교관(內侍敎官)이 되었고, 같은 해에 신숙주가
통신사로 일본에 가게 되자 역관으로 수행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후 세 차례나
더 일본을 왕래하면서 문장(文章)으로 일본의 조야(朝野)를 놀라게 하였다.
한편 중국으로 가는 사신(使臣)을 수행한 적도 일곱 차례나 된다.
중국 사행 당시 북경에서 안남국(현 베트남) 사신 레티꺼(Le Thi Cu, 黎時擧)와
시문을 주고받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외교적 공적이 인정되어
정3품(당하관)의 사역원정(司譯院正)에 특진되었다.
1485년(성종 16)에는 의사(醫司)에 속하여 음양의 이치와 약리(藥理)를 가르쳤으며,
1489년(성종 20)에는 내의원(內醫院)에 출사하였다.
1492년(성종 23)에 조신이 학식이 깊고 음률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안
유자광(柳子光)과 성현(成俔)은 성종에게 체아직의 녹봉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고 조위가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移配)를 가게 되자,
조신도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고향 김천으로 낙향해 은거하였다.
1503년 11월 형인 조위가 유배지인 순천에서 세상을 떠나자 고향인
김천으로 운구하여 장사를 지내고 우애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조신은 1529년(중종 24)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경북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에 있다.
1543년(중종 38)에 중종은 문장에 능한 사람을 우대하는 뜻으로
서출이자 역관출신인 조신(曺伸)에게 파격적으로 공조판서를 추증하고,
효강(孝康)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남긴 저서로는 1518년(중종 13) 왕의 명을 받아 김안국(金安國)과
더불어 편찬한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와, 적암시고(適庵詩稿),
백년록(百年錄), 소문쇄록(謏聞瑣錄)등이 있다.
적암유고서(適庵遺稿序) -허균 지음
적암(適菴) 조신(曺伸)은 매계(梅溪) 위(偉)의 서제(庶弟)로 생년과 생월은 같고
생일만 매계의 뒤인데 두 비계(毗界)가 모두 문장에 능하여 함께 선릉(宣陵,成宗)의
지우(知遇, 학문이나 재능을 인정, 좋은 대우를 해주는 것)를 받았다.
그러나 매계는 십년이내에 벼슬이 소사도(小司徒, 호조참판의 별칭)에 까지 뛰어 올랐고,
그는 출신이 미천하여 바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사알(司謁,조선시대 액정서, 掖庭署- 정육품 잡직의 하나), 공봉(供奉,예문관, 춘추관의 정칠품 벼슬)
그리고 합문(閤門, 통례원의 일명)에 있을 때 선릉(宣陵)이 때 없이 불러 만나 보았고
가끔 강운(强韻,어려운 운자)을 불러 시를 시험하면 대뜸 붓을 휘둘러 바치되
그 사의(詞意)가 아울러 아름다웠으므로 매년 의과(衣科)를 하사 받았다.
이어 일본에 들어갈 때 군직(軍職, 조선조 오위에 벼슬의 총 명칭)에 소속 되었다가
내시교관(內侍敎官, 내시를 가르치던 종 9품의 벼슬)이 되었고,
오랜 뒤에 대군사전(大君師傳,대군을 가르치는 벼슬)으로 옮겨갔다가
육전(六典, 육조의 집무규정으로 이전,吏典, 호전,戶典 등)이 반포(頒布)되면서
비로소 내의원(內醫院)에 소속되었고, 다시 명나라에 들어갈 때 사역원(司譯院)에 옮겨지는 등
근로(勤勞)를 쌓아 마침내 삼품계(三品階)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그는 문학이외에도 모든 기예(技藝)를 아울러 통(通)하였던 것이다.
중종(中宗)이 일찍이 그에게 감반(甘盤, 은고종,殷高宗의 이전 스승)의 구의(舊誼)가
있었으므로 대위(大位)에 오른 뒤에 그를 내의원정(內醫院正, 정삼품,正三品의 벼슬)으로 삼아
찬집청(纂輯廳)에 근무하게 하고, 특별히 당상품계(堂上品階)로 승진시키려하였으나
간관(諫官)의 반대로 그만 두었으며, 75세를 일기로 금산 본가(金山 本家)에서 세상을 떠났다.
내가 그의 백년록(百年錄)을 보건데 그 행적이 대충 이와 같았다.
선릉(宣陵)과 정릉(靖陵, 중종시대에 문화가 크게 진작되어
관각(館閣, 홍문관과 예문관)의 모든 노(老)선생중에 거경(巨卿)으로
일컬어진 이가 매우 많았으나 모두가 다 그를 엄지손가락으로 삼았다.
즉 남지정(南止亭, 지정은 남애,南哀의 호, 號), 박읍취헌(朴挹翠軒, 읍취헌은 박은,朴誾의 호),
이문민(李文敏, 문민은 시호 諡號), 김이숙(金頤叔, 이숙은 김안로 金安老의 자 字),
김문경(金文敬, 문경은 김안국,金安國의 시호), 이호숙(李浩叔, 호숙은 이항의 자),
김문정(金文貞, 문정은 김심의 시호)등이 질문, 분석할 문제를 모두
그에게 절충하곤 하였으니, 그 추중(推重)을 이루 짐작할 수 있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호)은 본시 고집이 세어 남의 재능(才能)을 인정한 적이 적었으나,
자신의 정률별장(鼎律別莊)에 그의 시와 용재(容齋, 이부,李符의 호),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호)의 글만을 써 붙인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조여익(曺汝益)에게서 그의 시집 두 권을 얻어 보았다.
실은 삼권(三卷)은 유실되고 이 이권(二卷)만이 남은 것인데,
그 내용이 준절(遵切, 힘차고 절실한 것)하고 간중(簡重, 간결하고 장중한 것)하다.
대저 이는 황진(黃陳, 송나라때 문장 황정견,黃庭堅과 진흥의,陳興義)에게서 나온 솜씨로
그들에 비하면 약간 더 섬세하고 대허(大虛,매계의 자)에 비하면 혼융(渾融)함은 같으나
격식(格式)과 음조(音調)와 문채(文采)에 있어서는 미흡(未及)이나
그러나 역시 국조(國朝)의 한 명가(名家)이다.
본조(本朝)에서 서출(庶出)로 세상에 알려진 자로는 어무적(魚無迹), 이효칙(李孝則),
어숙권(魚叔權), 권응인(權應仁), 이달(李達), 양대박(梁大樸)등이 가장 두드러졌는데
그중에도 그가 더욱 쓰임이 되었다. 명나라의 사신(使臣)이 올 적마다
으레 필찰(筆札)을 맡았고,
일시(一時) 제공(諸公)의 이 같은 추중(推重)을 받았으나
그 시집(詩集)이 여기에 그치고 말았다. 아뭏든 나는 평소 내가 몰라보았던
시잠(市潛,-대잠,大隱은 시중에 은거한다는 말로 적암,適菴에 비유)이
세상에 흔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 절실이 알게 되었다.
양천 허균 서(陽川 許筠 序)
*참고로 적암유고집 서문을 쓴 허균(1569~1618)은 조선중기에
형조정랑, 첨지중추부사, 형조참의를 지낸 문신이며 문인이다.
허균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작가로 유명하다.
그의 맏형 허성(許筬)은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다녀와서
일본 침략을 정확하게 예단한 인물로 알려졌으며,
그의 둘째 형 허봉은 명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조천기를 쓴 인물로 유명했다.
또 누이는 여류시인 난설헌이었다.
허균의 저서 국조시산에 덧붙여 자신의 가문에서 여섯 사람의 시를
뽑아 모은 허문세고(許門世藁)가 전한다.
허균은 한양의 부유하고 명문집 가정에 태어나 어릴 적부터 유성룡과 같은
명사들을 만나 학문을 배웠고, 서울의 명문집 자제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허균은 또 어릴 적에 누이 난설헌과 함께 서자 출신 시인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
이때부터 당시 서자들이 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를 알았다.
허균은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를 자신이 편찬해 죽기 전에
외손에게 전했으며, 그 부록에 한정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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