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쇄록(謏聞瑣錄)은 조선 성종 때의 역관이며 문인인 적암 조신(曺伸 1454~1529)이
자신의 다양한 지식과 경험, 관심사항을 자유롭게 기술해놓은 한편의 잡기집(雜記集)이다.
조신(曺伸)은 역관으로서 명나라에 일곱 번, 일본에 세 번 다녀왔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울에서 연경(燕京)까지의 지리에 관한 것과 중국의 운하를 이용한
치수사업도 소개했으며, 유구국(琉球國, 현 일본 오끼나와 일원)까지의 경로와 제주도까지의
험란한 해로(海路) 및 그 사이에서 일어난 표류사건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겼다.
또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경계 및 고적에 관한 내용은 물론, 사신(使臣)들의 시(詩)와
조선의 외교에 대해 기술해 놓았으며, 특히 외국에서 들어온 많은 서적의 목록도 기재되어 있어,
조선 초기의 외교와 문화교류사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있다.
그뿐만 아니라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문인, 지식층들의
동향과 시화(詩畵)에 관한 내용들도 54개 항목에 달한다.
이 소문쇄록의 잡록 1책 일부가 "대동야승"에 24조(條)로 채록되어 있으며
"시화총림(詩話叢林)"에 54조가 수록되어 있고 "연려실기술" 별집 야사류(野史類)와
그 외 "해동야언(海東野言)"의 인용 서목에도 중요한 채집본으로 되어 있다.
이는 우리나라 한시의 발전 양상을 검토하는 데도 도움을 주고 있으며, 특히 야담이나
시화· 잡록집에 재인용되고 있어 그 사료적·문학적 가치는 더욱 크다고 한다.
소문쇄록(謏聞瑣錄)에서 어숙권(魚叔權)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적암(適庵) 조신(曹伸)이 젊어서 재주 있기로 이름났는데,
성화(成化) 기해(己亥,1479)년에 통신사(通信使)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를 따라
일본(日本)에 갔으니, 이는 함허(㴠虛) 홍귀달(洪貴達)과 나재(懶齋) 채수(蔡壽)가
번갈아 천거한 때문이었다.
성종이 어필(御筆)로 다섯 개의 제목을 내어 시를 지어 바치게 하고,
또 여섯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어려운 운(韻)을 내어 시험하게 하였다.
떠나려 할 때에 함허(홍귀달)가 적암부(適庵賦)를 지어 주었다.
뒤에 물러와 영남(嶺南) 금산(金山,김천)에 살았는데,
시고(詩稿) 다섯 권과 소문쇄록(謏聞瑣錄) 한 권이 있다.
현재 전하고 있는 조신의 소문쇄록은 패림본,수일본등 여러가지가 있다.
특히 동아대학교 정용수교수가 국역한 "서벽외사해외수일본"은 상.하 두권으로,
상권에 132화, 하권에 137화등 총 269화의 고사일화를 담고있는데,
그 중 적암유고에 수록된 "소문쇄록서문"을 본다.
소문쇄록서
소문쇄록은 어찌 세실(細室)에 감추어 둔 중국의 전실(典實)한 말은 보이지 아니하고,
귀로 전해들었거나 불경스런 말만 표현했는가?
그래서 "소문"이라 했다. 조야의 여러 기록에 간간히 희학(戱謔)하거나 전인들의 음풍농월에
일자일언(一字一言)이라도 특이한 것이 있으면 망령되게 자질구레한 평론을 하거나
함부로 졸렬한 말을 덧붙여 "쇄록"이라 했다.
세상에는 무슨 일이든 수많은 변화가 있기 마련이어서 지나간 것도 무궁하고, 앞으로 올것도
끝이 없으니, 안다는 것이 괴이하기도 하고 가소롭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늦게사 말미천을 알아두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동물이나 식물과 같이
넓은 분야는 "편록"이 있지 아니하면 고금을 밤길 걷는거나 다름없다.
내가 한직에 있은 지 30년 동안 진신간(縉紳間)의 일을 자못 들었고,
동부서철(東浮西轍)에 본 것도 매우 많았으나 바빠서 짬을 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물러나 시골에 숨음에 미쳐 정원을 오가며 졸리울 떄 애오라지 집철(輯綴)코자
하였으나 기억이 아득하여 열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한탄할 뿐이었다.
옛날에는 등불의 심지를 잘라가며 소문을 이야기 했으니 의심나는 점을 전한 뒤에 비록 진실이
증명되더라도 죄안(罪案)될것이 없었는데 요즈음은 밭갈기도 멈추고서 책장이 넘치도록
기록하노니, 비록 신분을 망각했다손치더라도 어찌 거울삼을 것이 없다고 하겠느냐?
매계총화,추강냉화,최씨표해기를 안에다가 나란히 붙인다.
가정(嘉靖) 을유(乙酉,1525) 단오 아침에
적암노인(適庵老人) 조신(曺伸)은 금시헌(今是軒)에서 서(書)하노라.
이것은 소문쇄록 권상 첫쪽에 있는 1화로
"우리나라에는 문헌을 소장한 집안이 없다" 라는 제하의 글이다.
세상에 문헌을 소장한 집안이 적어 촌야의 한담을 수록한 책이 없으니, 삼한 이래로 조의(朝儀)나
지지(地誌)같은 것은 막연하여 알길이 없었다. 김부식이 찬한 삼국사년표는 원대(遠代)에 대해서
상세히 서술되지 않아서 고구려의 졸본천, 비류수, 환도곡, 송양국, 황룡국, 옥저, 예맥, 숙신,
발해 같은 것은 알 길이 없다. 그들이 사방팔방으로 이른 곳이 어디까진가?
고려가 번성할 때는 문사(文士)들이 빛나 잡저(雜著)나 패관소설 같은 것은 족히 가까이서 보고
고증할 수가 있었으나, 여러 번 난리를 만나는 통에 없어진 것인가?
오늘날에는 볼 수 없으니 참으로 탄식할 만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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