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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조문 인물과 발자취,묘소

적암 조신의 소문쇄록 ~ (5)충간공 조석문(曺錫文)

by 안천 조각환 2020. 12. 27.

적암 조신(曺伸)의 소문쇄록에 충간공 조석문에 대한 일화가 있다.

조석문(曺錫文)은 매계 조위선생은 물론 조신에게도 5촌 아저씨가 되며

어릴 때 서울 집에 데려다 놓고 학문을 손수 가르치신 분이다.

찬성공파 파조이신 찬성공 조경수(贊成公, 曺敬修)는 슬하에 3형제분을 두었는데

첫째는 조혼(曺渾)이고, 둘째가 조항(曺沆), 셋째가 김천 입향조이신

참의공 조심(參議公 曺深)인데, 조석문은 둘째인 조항(曺沆)의 아드님이고

매계와 적암은 셋째인 조심(曺深)의 손자(부는 조계문)로 5촌간(종숙)이 된다.

 

소문쇄록에 의하면

충간공 조석문(曺錫文)은 사람됨이 조심스럽고 삼가며 맑고 간소하여

세조에게 두터운 총애를 받았는데, 세조는 호조와 나라의 정책을 그에게 맡겼다.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을 떄 비록 장수로서의 지략에 익숙하지 못했지만

그에게 부원수를 제수해 주었으니, 그를 믿고 의지했기 때문이다.

퇴궐(은퇴)해서는 손님을 사절하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일찍이 위평공 홍윤성(洪允成, 1425~1475))에게 보낸 시에

 

집이 남산의 학동 서쪽에 있으니

소나무 잣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이 오르락 내리락하고

푸른 이끼 가득한 뜰에는 찾는 이 없으니

복사꽃 심어서 시내에 띄우려네.

 

라고 하였다. 스스로 그 고요한 흥취를 그린 것이다.

 

위평공이 답시(答詩)로,

 

그대는 산 남쪽에 있고 나는 서쪽에 있어

오르락 내리락 하는 두 곳의 사정이 비슷 하구료.

은근한 정으로 붉은 도화나무 캐서 보내니

잔 띄울 아홉구비 시냇가에 심으소서.

 

라 했는데, 홍윤성은 술 마시기를 좋아 하였으므로

술에 뜻을 붙여 지은것이다.

 

경산 반곡지

조석문(曺錫文,1423~1477)은

조선전기에 호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초명은 석문(碩門). 본관은 창녕. 자는 순보(順甫). 조우희(曺遇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경수(曺敬修)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조항(曺沆)이다.

어머니는 민설(閔渫)의 딸이다.

 

충간공 조석문의 묘(파주 장단 민통선안)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정자에 이어 집현전부수찬· 사간원정언 및

이조· 형조· 예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그만두고 장단(파주시 長湍)에 물러가 있자

조정에서 그 재주를 애석히 여겨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로 삼았다.

치적이 출중하여 홍주목사에 특진되었으며, 또한 관찰사의 추천으로

그 치적이 조정에 알려지자 상호군· 지형조사(知刑曹事)에 승진되고,

곧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1455년(세조 1)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수선(受禪)할 때 가담,

협력한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이 되고 1457년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1459년 명나라에서 우리나라가 야인(野人)에게 관직을 수여한 일로 사신을 보내 책망하자,

이조참판으로서 주문사(奏問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 호조참판에 임명, 창녕군(昌寧君)에 봉해지고, 뒤에 호조판서에 승진되었다.

 

1461년 호조판서로서 중외탁지사(中外度支事)를 총령(總領)하게 되고,

1466년 우찬성에 임명, 호조판서를 겸직하게 되었다.

호조판서를 겸직하게 한 것은 오랫동안 그 직책에 근무하여 회계 사무에 밝고

국가의 재정을 유족하게 하는 일에 힘썼기 때문이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이 일어나자 병마부총사(兵馬副摠使)로서 출정했으나

함흥에 주둔만 하고 전진하지 않아 여러 장수들의 불평이 많았다.

돌아오자 반란을 토평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며, 조금 뒤 영의정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왕명으로 노사신(盧思愼)과 함께 북정록(北征錄)을 찬정하였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뒤 남이(南怡)· 강순(康純) 등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써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또, 1471년(성종 2) 성종의 즉위를 보좌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476년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면하고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홍윤성(洪允成,1425~1475)은

1450년(문종 즉위) 추장문과에 급제했으며,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 2등에 올랐다.

1460년 여진의 난때, 신숙주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이를 진압했다.

1469년(예종 1) 영의정에 올랐으며, 1471년(성종 2) 성종의 왕권에 위협적이었던

구성군을 몰아낸 공으로 좌리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시호는 위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