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암 조신(曺伸)선생은 소문쇄록에서 시.화(詩.畵), 야사(野史)외에도
중국(7회)과 일본(3회)을 여러번 순행하면서 얻은 많은 경험과 지식들을 바탕으로
명나라 연경(중국, 북경)까지와, 유구국(오끼나와)까지의 거리,지리,지형등에 관해
상세하고도 유용한 기록들을 남겼다.
지금부터 510여년 전인 1510년, 바닷길까지도 하나하나 거리로 계산했던
그 엄청나고 신비스러운 기록들을 역사속에서 하나하나 만나본다.
1.국내 지리
고려시대에는 은으로 만든 병(甁)으로 돈을 삼았다.
이름을 활구(濶口)라 했다. 우리나라 지형을 본 떠서 이른 것이다.
요즘(1510년대)은 활구를 쓰는 제도를 볼 수 없다.
대개 우리나라 지세가 협소하면서도 길다.
왕도(서울)에서 남쪽으로 장흥까지는 구백칠십오리(五里, 390km)요,
북쪽으로 강계까지는 일천삼백삼십리요, 동북쪽으로 경흥까지는 이천삼백오십구리요,
서남쪽으로 진도까지는 구백리요, 서북쪽으로 의주까지는 일천일백사십리요,
동남쪽으로 울산까지는 구백이십리요, 동쪽으로 영해까지는 오백사십리요,
서쪽으로 고양까지는 삼십리니, 가히 활구같은 길쭉한 모양인 것을 알 수 있다.
*5리는 2km, 십리는 4km, 백리는 40km, 천리는 400km 임
따라서 진주야 천리길이란 서울에서 진주까지가 4백km란 애기다.
2.우리나라와 명나라 연경(중국 북경)
왕도(서울)에서 연경까지는 삼천이백사십오리(里,1,298km)요,
도문에서 의주까지는 일천일백사십리요
의주에서 요동까지는 오백오십리요, 요동에서 산해관까지는 안산, 해주위,
우가장, 사령, 고령, 반산, 광령위, 여양, 십삼산, 능하, 행산, 연산, 조장,
등관, 사하, 고령 등 열여섯 역이 있으며, 모두 팔백팔십리요,
관내에서 연경까지는 천안, 유관, 노봉구, 난하, 칠가령, 의풍, 영제, 양번, 어양,
공악, 하점, 노하 등 열두 역이 있으며, 모두 육백칠십오리 이다.
3.우리나라와 유구국(오끼나와)
왕도(서울)에서 유구국까지는 오천사백심십리(2,172km)요,
동래의 부산포부터 뱃길로 대마도의 도요사지까지는 사백팔십리(192km)요,
여기서부터 배월포까지는 일백 구십 리요,
일지도의 풍본포까지는 사백 팔십 리요, 모도이포까지는 오십 리요,
비전주의 상송포까지는 일백 삼십 리요, 혜나무까지는 일천 육백 오십 리요,
대도까지는 일천 사백 오십 리요, 도구까지는 삼백 리요, 여론도까지는 오백 오십 리요,
유구국까지는 일백 오십 리다. 육로로 모두 팔도 육십육 주(州)가 있다.
기내에 다섯주가 있고, 산성주에 속하는 군(郡)이 여덟이고,
대화주에 속하는 군이 열셋이고, 화천주에 속하는 군이 셋이고,
하내주에 속하는 군이 열하나고, 섭진주에 속하는 군이 열넷이다.
국도는 산성주에 있는데 성(城)같은 산이 있다.
북쪽에서부터 남동서로 돌면서 안는 듯이 하지만 남쪽에 이르러도 합쳐지지 않는다.
따로 원산이 있고, 그 입구에는 두 시냇물이 동서로 흘러 내려오다가
원산에 이르러 합류하여 남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도성에 있는 마을의 끝이 사방으로 통하고 대로는 아홉갈래다.
집은 이십만 육천 남짓되며. 골목에는 시장이 있고
국왕이하 여러 대신들은 다 분배된 토지로 세습했다.
비록 바깥주에 살아도 경저를 두었다.
천황궁은 동북쪽 모퉁이에 있고 국왕전은 궁의 서북쪽에 있고,
부산전은 궁의 동남쪽에 있고, 세천전은 국왕전의 서쪽 왼편에 있고,
무위전은 국왕전의 남쪽 오른편에 있다. 세 전이 서로 번갈아 가면서 관제(管提)가 된다.
관제는 관령으로 국왕을 도와 정권을 잡은자다.
경극전은 부산전 남쪽에 있으면서 대대로 형벌을 장악하고,
산명전은 국왕전의 서쪽 오른편에 있고, 무위전이 우리나라와 친밀하다.
동산도 팔주와 동해도 십오 주는 겸창전에 사는 사람들이 동도, 산양도 팔주라 하고,
대내전은 주방주에 있으니, 대내현 산구에는 양씨가 매우 많다.
백제의 후손으로 병력이 가장 강하다고 한다.
남해도는 여섯 주요, 북육도는 일곱주요, 산음도는 여덟주요,
서해도는 아홉주다. 소이전은 축천주의 재부에 있는데 박다까지는 삼리다.
원씨의 민호가 이천 이백 남짓된다.
대마도에 속하는 대우전은 풍후주에 있는데 박다의 동쪽이다.
원씨의 민호가 일만 남짓된다. 박다는 축천주에 있다. 혹 패가대라고도 하고,
석성부라고도 하고, 냉천진이라고도 하고, 거기진이라고도 한다. 민호은 일만 남짓된다.
소이전은 대우전과 반으로 나누어 다스리는데 소이전의 주인이
서남쪽 사천여호를 다스리고, 대우전의 주인이 동북쪽 육십여호를 다스린다.
주민들의 업은 행상으로 유구와 남만의 상선이 모인 곳이
북쪽으로 백사 삼십리에 걸쳐있는데, 소나무처럼 숲을 이루었다.
우리나라를 통행하는자는 구주(규슈) 중에서 박다가 가장 많다.
천엽전은 비전주에 있는데 북쪽으로 박다까지는 십오리다.
민호는 일천 이백 남짓된다. 국지전은 비후주에 있는데
관장하는 병사가 이천 남짓된다. 정통 팔년 계해년에 우리나라에서
신문충공(신숙주)이 사신으로 온 이후, 오늘날 연락이 되지 않는다.
문충공이 이르기를, 일본땅은 흑룡강의 북쪽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 제주도의 남쪽과 유구까지 서로 접한다. 그 형세가 매우 길다.
그 처음에는 곳곳마다 백성을 모아 각자 나라를 만들었다. 주나라 평왕 사십 팔년에
그 시조 협야가 병사를 일으켜 토벌하고 바로 소 주와 현을 두었다.
대신들이 각기 차지하고 나누어 다스리니, 중국의 봉건제도와 같다고 이를만 하다. 했다.
참고로 유구국은 현재 일본 최남단의 섬이며 현으로.
현정 소재지는 나하이며 류큐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이다.
15세기에 류큐 왕국이 수립되었다가 메이지 시대 일본에게 강제로 복속되었다.
오키나와 섬은 태평양전쟁 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 중 하나로
1945년 4월 미군이 합동 상륙작전을 감행했고,
일본군이 이에 대해 강력한 방어전을 벌여 3개월 동안 일본군 10만 명이 전사했다.
종전 후에 미국이 계속 통치하다가 1972년 일본에 반환됐으나
광범한 미군시설이 계속 주둔하면서 양국간의 현안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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