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성화(成化) 병신년(丙申年,1476년)에
군수가 되기를 청하여 선산부사가 되었다.
그때는 공(公,김종직)이 큰 병을 앓고 난 뒤라 말을 타기가 불편하여
내(조신.曺伸)가 모시고 배로 갔다.
*성화(成化)는 명나라 성화제의 연호이며,
성화 병신년은 1476년으로 성화 12년이며, 조선 성종 7년이다.
여주에 이르러 닻을 내린 뒤 미복(微服)을 입고
청심루에 올라가 시판(詩板)을 보고 있자니,
누구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어서 김생원의 행차라고 대답하였다.
이윽고 내려오니 날이 저물어 이미 어두웠으므로
신륵사에 투숙하려고 했는데, 절의 중이 삼문 밖에서 재를 올리면서
잡인을 소리쳐 쫓아내는 바람에, 공(公)이 끝내 들어가지 못했다.
배로 돌아와서 시 두 편을 읊었는데, 한 편은 주지승에게 주는 것이었고,
다른 한 편은 주관(州官)을 반쯤 꾸짖었다.
십년 세상살이 읊조리는 가운데 외롭고
팔월달 나그네 수풀사이에서 어지럽다.
라고 했다. 이 구절을 임원준이 보고 말하기를,
이러한 말은 결코 요즈음 사람이 능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
“조령을 지나면서 지은 시”에
천령에 부절(符節)을 나누어 가니
봉우리에 언 눈이 하늘에 비치네.
회계에 부인(符印)을 차고 돌아오니
시냇가 꽃잎은 붉게 피었는데
대궐에서 임금님 모시는 일 멀어지고
부모님 웃음소리 무르녹겠지만
아득한 십 년 사이에
조그마한 공 하나 세우지 못했네.
낙동진시(洛東津詩) 에서는
나루터 사공이 여울물의 뱃사공이 아니거나
관인은 바로 읍인 이라네.
삼장(三章)을 올려 성주에게 사직하니
태수는 자친을 위로하는데
백조는 노를 맞이 하는 듯하고
청산은 떠나는 나그네에 익숙하도다.
맑은 강은 한 점 티 없으니
내 한 몸 개울로 지키려네. 라고 했다.
공이 관직에 있으면서 청빈하고 신중했음이 이 안에서도 나타난다.
*참고로 이 당시는 주로 강의 뱃길을 이용하여 다녔던 때인지라
서울의 한강에서 배를 타고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까지 와서
하루를 쉬었다가 다시 배를 타고 남한강을 따라 충주까지 온 후,
육로를 이용하여 조령을 넘고 문경까지 와서, 또 다시 영강의 뱃길을 따라
상주까지 와서, 안동.예천을 지나 흐르는 낙동강을 만난 후
선산이 까까운 낙동진에서 내려 선산관아로 이동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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