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의 꿈이 담긴 성곽으로 둘레는 5,7km로
성벽은 돌로 쌓았으며 성문은 동서남북에 4개가 있는데 북문이 장안문이고
반대 남쪽이 팔달문이다. 동서에 청룡문과 화서문이 있다.
이외에도 수문 2곳, 적대 4곳, 노대 2곳, 공심돈 3곳, 봉돈 1곳, 치성 8곳,
포루 10곳, 장대 2곳, 각루 4곳, 포사3곳 등의 시설이 있다.
서장대(西將臺)는 동장대(東將臺)와 함께 군사 지휘소로
사방이 탁 트여 수원시내를 한눈에 볼수있는 곳이다.
특히 서장대는 정조대왕의 친필 화성장대 현판과 시가 걸려있어
더 격조높은 곳이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이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제되었다.
재위 15년째인 1791년 사도세자의 능을 화성으로 이장한 정조는 첫 참배를 떠났다.
무덤 이름은 현재의 현륭원으로, 사도세자에게는 일찌감치 장헌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그리고 출발 전 정조는 “옛날 온천에 행차할 때도 평융복(平戎服)을 입기도 하고
혹은 군복을 입기도 했다. 앞으로 현륭원에 행차할 때 복장도 이대로 해야겠다."
라고 하명했다.(1791년 1월 14일 ‘정조실록’), 평융복 또한 군복의 일종이다
. 1월 16일 한성을 출발한 참배 행렬은 진눈깨비 속에 수원부에 도착했다.
다음 날 정조는 현륭원에 올라 제사를 올린 뒤 18일 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4년 뒤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을 맞아 정조가 화성으로 행차를 한다.
어머니가 탄 가마가 앞서고 군복을 입은 정조가 백마에 올라 뒤를 따랐다.
윤2월 꽃들이 만발한 봄날이었다.
참배를 마친 그날 밤 정조가 황금 갑옷으로 갈아입고 화성 산성에 올라 야간 군사훈련을 벌였다.
훗날 정조가 ‘화성장대’라 명명한 서쪽 지휘소 즉 서장대(西將臺)에서 포성이 울리자
화성 동서남북문에서 잇따라 청룡기와 주작기와 백호기와 현무기가 나부끼고 포를 응사했다.
발아래에는 야심작인 신도시 화성이 펼쳐져 있었다. 장관이었다.
만족한 정조가 시를 썼다.
이 편액은 정조대왕이 1795년 화성에서 군사훈련을 참관하고
수원화성과 장용영 군사들의 위용에 만족감을 표현한 시로 복원하여 게시하였다.
화성장대친열성조유시제우미상(華城將臺親閱城操有詩題于楣上)
화성장대에서 친히 성안의 군사조련을 보고 시를 지어 문위에 걸다
공호사위중 경영불비노(拱護斯爲重 經營不費勞)
성종평지형 대의원천고(城從平地逈 臺倚遠天高)
만타규모장 삼군의기호(萬타規模壯 三軍意氣豪)
대풍가일주 홍일재린포(大風歌一奏 紅日在麟袍)
나라를 지키는일 중대하여, 비용과 노력을 허비하지 않게 경영하니
성은 평지를 따라 멀리 둘러있고, 장대는 멀리 하늘 높이 솟아있네.
수 많은 치와 포루는 규모가 장대하고, 삼군의 의기가 참으로 호쾌하니,
대풍가 한가락을 연주하니, 붉은해(석양)가 갑옷위에 빛나네.
화성(사적 제3호)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는데
노대는기계식 활인 노를 쏘기 위헤 높게 지은 군사시설이다.
서노대는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지키기 위한 역할을 하며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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