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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세계문화유산.유적

사도세자와 정조가 잠든 융릉과 건릉

by 안천 조각환 2021. 3. 17.

경기도 화성시 효행동에 자리한 융릉(隆陵)과 건릉(健陵)

사도세자인 장조와 조선 22대 정조대왕의 능으로, 사적 제206호이다.

특히 조선왕릉은 종묘(1995년) 및 창덕궁(1997년)에 이어 수도권은 물론 

영월의 장릉까지 조선왕릉 40기 전체(북한소재 2기 제외)가

2009년 6월 30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융릉과 건릉으로 가는 솔숲길 ~  이 솔숲길을 조금가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융릉이고, 왼쪽은 건릉이다

 

장조(사도세자)는 영빈이씨의 소생으로 1736년(영조 12)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정치싸움에 휘말려 영조의 진노를 얻어 뒤주 속에 갇혀 죽었다.

영조가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서울 휘경동 배봉산 기슭에 초장한 것을

1789년(정조 13)에 정조가 이곳으로 이장하고 현륭원(顯隆園)으로 명명하였다.

 

융릉 가는길의 참나무 숲길

 

그 뒤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승격하였다.

혜빈 홍씨는 1815년(순조 15)에 죽어 그 이듬해에 현륭원에 합장되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1759년에 왕세손으로 책봉된 뒤

1776년에 즉위하여 24년간 재위한 뒤 1800년에 죽자 현륭원 동쪽에 초장하였다가

효의왕후가 1821년에 죽자 현륭원 서쪽으로 이장하여 합장하였다.

 

금천교

 

금천교(禁川橋)는 경계의 다리로, 즉 신과 인간세계의 경계

 

홍살문 안으로 보이는 정자각과 융릉

 

향로와 어로 표시

 

향로(香路)는 제향시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이며,

어로(御路)는 제향을 드리러 온 왕이 걷는 길이다.

 

정자각

 

정자각은 조선 왕릉에서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중심 건물로

그 모양이 ‘丁’자와 같아 ‘정자각(丁字閣)’이라고 불렀다.

조선왕릉의 정자각은 봉분 아래에 있으며, 대부분 같은 형태이다.

 

정자각과 왕릉

 

정자각 내부

 

앞의 창문을 열면 왕릉이 보이는 제향공간이다

 

융릉

 

사도세자(뒤에 장조)와 헌경왕후의 융릉으로 사적 제206호 이다.

역사속에서 보는 사도세자는 당파싸움의 희생물이다.

경종이 후사가 없는 데다 신병이 많아지자, 노론의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 등 4인방의 주장에 따라 영조가 세제로 책봉되는데,

소론 측에서는 시기상조론을 들고 나와 노론의 4대신을 4흉(四兇)으로 몰아 처형했다.

영조는 왕위에 올라 자신을 왕으로 만들었던 노론의 의리를 정당화하고

정치적 평정을 이루려고 탕평책을 쓰지만 노론의 편이 아닐 수 없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정치가 옳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세자가 영조를 대신해 정무에 임하게 되자 노론에 불똥이 떨어졌다.

그래서 줄기차게 사도세자의 흠을 들추면서 이간질했고,

드디어는 사도세자가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문란한 행동을 일삼는다고

무고하기에 이르렀으며 이에 세자는 급기야 정신 질환을 앓게 된다.

결국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는다.

 

융릉 표석 비각 ~  비각안에는 현륭원 표석과 융릉표석 두개의 석비가  세워져 있다.

 

그 후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여 당쟁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펼치며

신진 세력을 등용하는 한편 화성 건축을 통해 왕권의 강력함을 보여주려 했다.

또 즉위 초부터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기 위해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으로 올리고, 양주 배봉산에 있던 능도

1789년 이곳으로 옮긴 후 능호를 융릉으로 바꾸었다.

고종 때 장헌세자를 의황제로 추존함과 동시에 장헌세자비도 의황후로 올렸다.

 

현륭원 표석

 

현륭원 표석은 1789년(정조 13) 양주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긴 후, 원의 이름을 현륭원으로 바꾸고 세운 표석이다.

 

현륭원 비문

조선국 사도장헌세자 현륭원(朝鮮國 思悼莊獻世子 顯隆院)

 

융릉 표석

 

융릉 표석은 1899년(광무 3)에 장헌세자를 장조의황제로 추존한 후,

이듬해에 현릉원 옆에 새로 세운 표석이다.

 

융릉 비문

대한 장조의황제 융릉, 헌경의황후 부좌(大韓 莊祖懿皇帝 隆陵, 獻敬懿皇后 袝左)

 

융릉 측면

 

건릉 가는길은 나무 잎이 벌써 푸르다

 

건릉 홍살문

 

건릉 정자각

 

건릉(健陵)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正祖,1752~1800)와

효의왕후 김씨(1753~1821)의 능으로, 사적 제206호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장조)의 둘째 아들로 영조가 떠나자 왕위에 올랐으며

제위 기간 동안 당파와 신분의 구분없이 능력과 학문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다.

학문연구 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였고 수원화성을 건축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원래 묘호는 정종(正宗)이었으나 1899년 정조선황제로 추존되었다.

 

건릉 표석 비각

 

건릉 표석은 1900년(광무 4) 정조가 황제로

추존된 후 세운 표석을 갈아서 다시 만든 표석이다.

 

건릉 비문

대한 정조선황제 건릉 효의황후부자 (大韓 正祖先皇帝 健陵, 孝懿皇后袝左)

 

홍살문 밖으로

 

융 건릉 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