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문씨 본리세거지에 홍매가 꽃봉우리를 터뜨리면서 봄을 맞이하고 있다.
한파가 이따금씩 몰아치면서 봄의 시샘을 넘어 봄을 맞는 꽃들을 얼게 만든다.
그래도 봉우리속의 꽃망울은 춘정을 못이겨 예쁜꽃잎을 틔우곤한다.
문익점(文益漸)선생의 생몰연대는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난다.
역사에는 1329년(충숙왕 16)에 태어나 1398년(태조 7)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이곳에는 생몰이 2년씩 늦은데, 일단 여기에 세워진 행적을 위주로 기술해 본다.
참고로 문익점선생은 진주 강성현(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출생하였고,
이곳에 목화시배지가 있으며, 부조묘는 전남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에 있다.
1331년 산청에서 출생, 1360년 과거에 정몽주와 함께 급제하였다.
1363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에 갔다가 1363년 귀국하면서 목화씨를 가져왔다.
당시 고려에는 목화가 없어 백성들은 삼베옷으로 추위를 견뎠다.
많은 관리와 학자, 승려, 상인들이 원나라에 드나들었지만
그 누구도 목화씨를 들여와 백성의 고통을 덜어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직 애민사상이 투철했던 문익점선생만 목화씨를 들여올 생각을 했고 행동에 옮겼다.
원나라의 반출 금지 품목이었던 목화씨를 위험을 무릅쓰고 고려로 들여와
백성들이 따뜻한 목화옷을 입고 솜 이불을 덮을 수 있게 했다.
장인 정천익과 목화 번식에 성공하고 후손들이 목면 가공 기술을 개발하여
백성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의류생활에 혁명을 일으켰다.
부모상을 당했을 때는 3년씩 시묘한 효자로 동방도학의 으뜸으로 칭송받았으며,
좌사의대부서연동지사(左司議大夫書筵同知事)를 끝으로 귀향했다.
조선의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1400년 세상을 떠나셨다.
사후 태종은 강성군(江城君)에 봉하고 충선공(忠宣公) 시호를 내렸고
세종대왕은 영의정에 추증하고 부민후(富民侯)에 봉하였다.
정조는 도천서원 현판을 사액하여 문화영웅인 선생의 위대한 삶을 기렸다.
'그곳에 가고싶다 > 대구.경북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덕 메타숲을 걷고 구주령을 넘어 영양으로 (0) | 2021.03.03 |
---|---|
봄눈 오던날 매화나들이 (0) | 2021.03.02 |
희귀보호식물인 변산바람꽃과 너도바람꽃을 찾아서 (0) | 2021.02.15 |
문경 진남교반과 석탄박물관 (0) | 2021.02.06 |
감포의 겨울바다 (0) | 2021.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