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文益漸,1331~1400, 또는 1329~1398)선생은 고려 말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다.
문익점은 1331년 진주 강성현(江城縣, 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태어났다.
1360년(공민왕 9)에 문과에 급제한 뒤 김해부 사록(司錄) 등을 역임하였다.
1363년 사간원 좌정언으로 있을 때, 사신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갔으며, 귀국할 때 목화씨를 붓대롱에 숨겨 와서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재배하여 우리나라 의생활 발전에 혁신을 가져 왔다.
선생의 생가마을이며 목화 시배지(최초 재배지)이기도 한 산청 사월리와
선생의 부조묘(不祧廟,불천위 사당)가 있는 전남 보성 도개마을을 찾아나선다.
목면시배지(木棉始培地)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한 곳으로,
목화밭과 전시관, 부민관 등을 볼 수 있는곳이다.
오른쪽은 "삼우당 문선생 면화시배 사적비(三憂堂文先生棉花始培事蹟碑)" 이고
왼쪽은 "삼우당 문익점선생 유허비(三憂堂文益漸先生遺墟碑)" 이다
문익점선생은 고려말 전의주부(典儀主簿),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등을
역임하였는데, 이성계(李成桂)일파의 전제개혁에 반대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조선 태종 때 참지정부사 강성군(江城君)에, 1440년(세종 22)에는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문익점은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후, 이곳에서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시험재배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잘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수 있었다.
그러다가 3년간의 노력 끝에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재배를 널리 퍼지게 하였다.
그 이전에는 명주, 모시, 삼베 등으로 의복을 만들어 입었기 때문에
일반백성들은 추위에 떨며 고생을 하였으나 목면의 전래로
우리나라 의복 역사상 일대 혁명을 가져왔고 서민생활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사월리는 문익점 선생이 태어난 곳이며, 또한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를 하고 있을 때
왜적이 침범해 왔고 지나는 곳마다 분탕질이 심하여 모두 피난을 갔지만
선생은 홀로 여막을 지키며 평소와 같이 곡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왜적도 감동하여
나무를 다듬어 "효자를 해치지 말라"고 써서 세운뒤에 일대가 평안하였다고 한다.
이후 1383년(우왕9)에 정려를 내리고 이 마을을 효자리라 이름하였다 한다.
사월리 동편에 위치한 배산서원(培山書院)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1호이다
배산서원안 문묘에는 공자를, 도동사에는 청향당 이원, 죽각 이광우,
퇴계 이황, 남명 조식의 위패가 함께 봉안되어 있다.
문익점의 생가마을인 사월리는 선생의 외손인 합천이씨들의 집성 세거지이다.
문익점을 배향한 사당인 부조묘(不祧廟)는 1398년(태조 7년) 이곳에 세웠었는데,
문익점의 사손(嗣孫 조상의 제사를 맡아 받드는 자손,)이 끊겨
외손인 합천이씨가 관리해 오다가 1592년 임진왜란시에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 후 1854년(철종 5)에 남평문씨 후손들과 유림들의 노력으로
전남 보성 도개마을로 부조묘를 옮겨 복설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조묘(不祧廟)란 본래 4대가 넘는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다.
따라서 불천지위가 된 대상은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삼우당 문익점의 부조묘는 문익점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 부조묘는 1398년(태조 7년) 경남 단천(현 산청 단성면)에 세워졌던것을
1854년(철종 5)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와 복설하였다.
사당에는 "부인후묘"라는 현판이, 내삼문에는 "충신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1988년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65호로 지정되었다.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부민후묘(富民侯廟)
문익점선생이 사신의 일행으로 원나라에 간 때는 1363년(공민왕 13)이었다.
당시 충선왕(재위 1308~1313)의 아들 덕흥군이 그곳에 가 있었다.
덕흥군은 고려황실에서는 쫓겨난 몸이었지만 1363년 원나라로부터
고려의 왕으로 인정받고 고려를 정벌하려다가 실패했다.
이때 그를 따라 다음해인 1364년 고국으로 돌아온 문익점은
덕흥군에 붙었다고 해서 파직되어 쫓겨났다.
삼우당(三憂堂)이라는 호는
"1)항상 국가의 어려움을 걱정하고 2)성리학이 보급되지 않음을 걱정하며
3)자신의 도가 부족함을 걱정한다" 는 것으로 선생이 직접 지은 호이다.
목화에 관한 사적은 조식이 쓴 "목면화기(木棉花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조식(曺植)은 후일 선생의 공로를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后稷)과 같다.”고 찬양하였다.
남평문씨 본리세거지는 문익점의 18대손인 문경호(文敬鎬, 1818-1874년)가
19세기 초반 지금의 세거지 인근에 자리 잡은 뒤, 원래 절이 있던 명당터를 구획하여
집터와 도로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1856년 문경호의 둘째 아들인 문달규(文達奎)가
지금의 종택(文定基 가옥)의 터에 초가를 짓고 나서부터 주택들이 차례로 건축되었다.
지금은 조선 후기의 전통가옥 9채와 정자 2채가 남아 있으며,
이곳의 대표적인 건물로는 수봉정사와 광거당· 인수문고를 들 수 있다.
남평문씨 본리세거지는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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