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와룡면 오천리에 위치한 군자마을의 오천유적지는
조선 초기부터 광산김씨(光山金氏) 예안파(禮安波)가 약 20대에 걸쳐
600여년동안 세거해온 마을로 세칭 오천 군자리라 부르는 유적지이다.
이 마을 광산김씨 입향조(入鄕祖)는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이며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던곳으로,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지역이 되자
수몰지역내 건물들을 집단 이건하여 원형 그대로 보존한 "오천유적지"이다.
이 중 탁청정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26호, 후조당(後彫堂)은 제227호로 지정되어있다.
특히 1541년(중종 36) 김수(金綬)가 지은 탁청정의 현판은 명필 한석봉의 글씨이다.
군자마을
예안에 정착한 김효로(金孝盧)는 그 후 가세가 융성하여 아들 운암
김연(金緣, 1487~1544)은 1519년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에 오르고,
둘째 아들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 1481~1552)는 생원시에 올랐다.
김연의 아들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은
학행이 높아 뒤에 문순(文純)을 시호로 받았으며,
김부필의 동생 읍청정(揖淸亭) 김부의(金富儀, 1525~1582)는
진사로 성리학에 밝았고, 김유의 아들 김부인(金富仁, 1512~1584),
김부신(金富信), 김부륜(金富倫, 1531~1598) 삼형제가
모두 문명과 덕망을 떨쳐 오천리의 군자로 일컬어졌다.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 ~ 입향조 김효로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건물
김부의의 아들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1641)는
예문관검열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용궁, 밀양, 경주 등지에서 활동하다 진중에서 죽었다.
안동 후조당 종택입구
김부륜의 아들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9~1641)은 1612년
문과에 올라 사간원사간을 지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오천세거지를 군자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군자리"라 불렀다.
후조당
후조당(後彫堂)은 광산김씨(光山金氏) 오천종택(烏川宗宅)에
부속된 별당(別堂) 건물로,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이
임진왜란 이전에 건립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중창되었으며,
종택(宗宅)의 정침(正寢)은 근년에 중건(重建)되어 후조당과 사당만이
옛 격식(格式)을 유지하고 있으며,
후조당(後彫堂)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27호로 지정되어 있다.
후조당 종택 사당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1516~1577)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언우(彦遇). 호는 후조당(後彫堂). 안동 예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대사헌
김연(金緣)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조치당(曺致唐)의 딸이다.
후조당 사랑채 ~ 사랑채 뒤에 안채가 있다.
후조당은 1537년(중종 32)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였으며, 1556년(명종 11) 41세의 나이로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제자로서의 예를 올렸으며,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사양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사랑채와 읍청정을 연결되는 중문
아우 김부의(金富儀), 4촌형 김부인(金富仁), 4촌아우 김부신(金富信)·
김부륜(金富倫), 고종 금응훈(琴應壎)· 금읍협(琴應夾)과 한 동네에 살면서
학문을 토론하고 덕업을 권장하여 향리에서는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라
칭송되었다. 1574년에는 조목(趙穆)과 함께 도산서원 건립을 주도하였고,
1822년(순조 22)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읍청정(挹淸亭)
읍청정(挹淸亭)은 후조당 김부필의 아우인
김부의(金富儀, 1525~1582)가 지은 건물이다.
읍청정 전경
탁청정
이 정자는 탁청정(濯淸亭) 김 유(金 綏, 1491~1555) 종택에 부속된
정자로서 조선 중종 36년(1541)에 건립되었는데, 영남지방의 개인
정각으로서는 그 구도가 가장 웅장하고 우아하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국가민속문화재 제226호이다.
탁청정 현판
탁청정이라는 현판은 석봉 한호(한석봉)의 필적이며 대청마루에는
농암, 퇴계, 금계, 청풍자 선생 등 당대 명현들의 시판이 걸려 있다.
김유(金 綏,1491~1555)의 본관은 광산. 자는 유지(綏之), 호는 탁청정(濯淸亭)이다.
아버지는 광산김씨 예안 입향조인 농수(聾叟) 김효로(金孝虜, 1454~1534)이다.
아들은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로 불리는 김부인(金富仁, 1512~1584),
김부신(金富信, 1523~1566), 김부륜(金富倫, 1531~1598)을 두었다.
신남정
침락정과 계암정 사잇문
계암정(溪巖亭)
군자마을에는 이외에도 20여채의 고택과 정자로 형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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