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 개비리길은 창녕 남지 용산마을에서 영아지마을에 이르는 낙동강가의 오솔길로
수십미터 절벽위를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며 자연적으로 조성된 벼랑길을 말한다.
소금과 젓갈을 등에 진 등짐장수와 인근 지역민들의 생활길로 애용됐으며,
조선 시대 고지도와 일제강점기 지형도에도 옛길의 경로가 기록돼 있는 유서 깊은 곳으로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되어 2021년 12월 10일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 길은 낙동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걸을 수 있는 호젓한 길인데,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장군이 육지에서 첫 승리를 거둔 기음강전투의 역사적 현장이며,
6.25전쟁 때는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개비리길은 강가 절벽길과 마분산(馬墳山·180m)을 둘러 오는길로 왕복 6.4km이다.
영아지마을앞 비리길입구
남지 개비리길에는 재미있는 유래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 그 옛날 영아지마을에 사는
황씨 할아버지의 누렁이 개가 11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개의 젖은 10개밖에 되지 않아
그 중 조리쟁이라는 새끼는 항상 젖먹이 경쟁에서 밀려 마르고 못나고 볼품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10마리는 남지 장에다 내다 팔고 조리쟁이 한마리만 남겨두었는데,
등너머 시집간 딸이 내가 키우겠다며 시집인 알개실마을로 데려갔다.
남지 개비리길
그 며칠 후 딸은 깜작 놀라서 보니 친정 누렁이가 와서 새끼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고
그 이후에도 계속 하루 한번씩 와서 젖을 먹이고 있었으며, 폭설이 내린날에도
누렁이는 알개마을에 나타났는데 어디로 왔는지 누렁이 뒤를 따라가 살펴보니
눈이 없는 절벽의 경사진면을 따라 다녔던것을 확인하고, 이때부터 마을사람들도
산 고개를 넘는대신 개가 다닌길로 다니게 되면서 개비리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로는 "개"는 강가를 뜻하며, "비리"는 벼랑이라는 뜻의 벼루에서 나온말로
강가 절벽위에 난 길이라는 뜻으로 개비리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남지 개비리길의 낙동강변
나목의 강변길인데 잎피고 꽃필 때 더욱 아름다운 개비리길을 걷고싶어진다
사람얼굴을 닮은 바위
중간쯤되는곳의 죽림쉼터
여양진씨 재실인 회락재가 있던 자리(유허지 표지판)
이곳 죽림쉼터는 큰 대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여양진씨(驪陽陳氏)들이 묘사를 지내던
회락재(匯洛齋)라는 목조 단층 와가의 재실과 초가의 살림집이 있던 자리이다.
이 회락재는 오래전부터 관리하지 않아 훼손이 심하게 되어 있었고
회락재 10여m 인근에는 초가의 살립집도 있었는데 방과 부억, 창고가 모두 허물어져
2015년 4대강 정비사업시에 복구가 어렵다고 판단되어 건물을 헐어버리고
지금의 죽림쉼터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살림집이 있던 자리의 감나무와 회락재(匯洛齋) 편액
아쉬운점은 지방자치단체마다 형체도 없고 전설만 있어도 새로 조성하는 추세인데,
비록 훼손이 심했었다 하더라도 기존 건물과 편액까지 있었고, 살림집에는 헌 농기구까지
있었는데도 복원하지 않고 모두 헐어버리고 말았다는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이라도 그 자리에 새로 복원해 놓는다면 죽림과 낙동강, 그리고 고가 재실이
한데 어우러진 더욱 운치있고 멋스러운 남지 비리길이 되지 않을까 한다.
경북 상주보의 이건한 도남서원은 새로운 볼거리로 탄생하게된 좋은 예일 것이다.
죽림쉼터의 낙동강변
옹달샘
옹달샘 옆의 층층나무와 옥관자바위
층층나무
1929년경 의령 두곡마을의 재령이씨 할머니 창원황씨가 꿈에서 본
층층나무밑에서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여 아들이 관직에 입문하게되고
구설없이 고을원까지 오르게되자, 남지에서는 집안에 층층나무를 심으면
막힘이 없이 관직에 층층이 오른다는 영험있는 나무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옥관자바위
봉황새의 알처럼 타원형 모양으로 생겼으며 높이가 5척이 넘는 1m 60cm이다.
이 바위는 층층나무와 함께 치성을 드렸던 옥관자 바위로 알려지고 있으며
2018년 6월에 수로공사 중 발견하였는데, 영험한 기운이 있다하여 층층나무옆에 두었다.
대설이 지난 초겨울날의 화려한 꽃과 나비
홍의장군 붉은 돌 신발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홍의장군 곽재우의 붉은색만 보아도 두려워하여 도망쳤다고 한다.
어느날 기음강변에 왜구가 나타났다는 전갈을 받고 급하게 기음강을 건너다가
한쪽 신발을 잃어버리고 한쪽신발은 낙동강에 떠내려갔는데, 홍의장군이 "한쪽신발을
보관만하여도 왜구들이 침입하지 못할것이다"하여 남지 창나루강변에 놓아두었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빼앗아 낙동강변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그 후 창나루 주민들이 마분산 말무덤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어느날 마을이장 꿈에 홍의장군이 나타나 붉은색 신발을 줄터이니 잘 보관하라고 하여
꿈에본 기음강주변에 가서 보니 땅속에 신모양의 돌이 있어,
감사의 고유제를 지내고 이곳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이곳 남지 비리길과 남지철교 일대는 6.25전쟁 발발 후 9월 15일까지 적과 일전일퇴의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끝까지 진지를 사수한 곳이다.
낙동강 남지전투로 9월 8일에는 남지철교(등록문화제 제148호) 중앙부가 폭파되었으며
치열한 전투로 낙동강물이 붉은 피빛으로 물들었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전세가 역전되어 아군이 낙동강을 건너 반격하게 되었으며,
인천상륙작전과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말없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그곳에 가고싶다 > 부산.울산.경남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합천 허굴산 천불천탑 용바위 (0) | 2021.12.28 |
---|---|
창녕 사리 문암정과 배롱나무군락지 (0) | 2021.12.12 |
섣달을 앞둔 남쪽바다에서 (0) | 2021.11.30 |
낙동강 합천 창녕보와 창녕 함안보 (0) | 2021.11.25 |
창녕 금호재와 고리백정의 사위가 된 병조판서 이장곤 (0) | 2021.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