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2대 인종대왕 태실은 영천 치인리 은해사 안쪽 태봉정상에 있다.
인종대왕(1515~1545)은 장경왕후의 소생으로 1544년 왕위에 등극하여
기묘사화로 없어진 현량과를 부활하는 등 어진정치를 펴고자 하였으나
병약하여 뜻을 펴지 못하고 이듬해인 1545년 30세에 죽음을 맞았다.
인종대왕태실
인종대왕태실은 중종 16년(1521)에 조성되었고, 이후 인종이 죽고 난 후
명종 1년에 가봉(加)封)공사가 있었으며 숙종 37년(1711)에 보수되었다.
일제강점기이던 1928년, 태실이 전국각지에 흩어져 있어서 관리가 어렵다는
명목으로 54기의 태실을 경기도 고양에 있는 서삼릉으로 모두 옮겨 봉했는데
이때 인종태실에 있던 태항아리와 지석 1점도 같이 옮겨졌다.
1999년 발굴조사한 후 2007년에 보수·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이 태실은 가봉된 다른 어떤 태실보다 그 규모가 크고 각종 석조물의 장식이
화려하고 웅장하며 조성연대가 분명하여 태실조성 양식과 조각기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하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봉
인종태실을 가려면 우선 영천 은해사로 간다음 사찰 골짜기 안으로 한참을 가면 신일지라는
못이 나오는데, 삼거리 갈림길 중앙에 보이는 둥그스럼한 봉우리가 바로 태봉이다.
입구 안내판을 따라 20여분(약 800m) 전후를 오르면 조선시대의 유적을 만날 수 있다.
태봉입구에 있는 인종태실 안내판
조금 오르면 보이는 신일지와 입구
가는길은 제법 가파른 편이다
태봉 정상의 인종대왕 태실
조선시대의 태실은 왕자가 출산한 후 태를 깨끗이 씻어 항아리에 넣은 후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봉해 다시 붉은색 끈으로 묶어 작은 항아리에 넣은 다음 더 큰 항아리에 담았다.
이렇게 만든 두 개의 항아리에 태를 보관했고 항아리에 보관된 태는
태봉지(장소)를 선정해 묻게되는데, 태봉지가 정해지면 궁에서는
태봉출 의식을 행하고 그 행렬이 태봉지로 출발해 도착하면
그곳의 지방관들은 태를 봉안하는 의식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을 지원했다고 한다.
태실
태실은 대개 대석, 전석, 우상석, 개첨석 등으로 만들었다.
왕세자의 태실은 석실을 만들고 비석과 금표를 세웠다가 국왕으로 즉위하면
태실을 가봉했으며, 국왕태실은 8명의 수호군사를 두어 관리했고
태실 주변은 금표로 접근을 제한했다고 한다.
인종대왕 태실의 가봉비는 원형을 그대로 살려 이수와 거북모양을 한
비좌와 비신으로 되어있으며, 비신앞면에는 "인종대왕태실(仁宗大王胎室)"
뒷면에는 가정 25년(1546년) 5월 일건(嘉靖二十五年五月日建) 이라 새겨져 있다.
*지석에는 "1515년 2월 25일 오후 8시생 세자 호(岵)의 태를 1521년 1월 17일 묻다"
특이하고 화려하며 웅장하다
왕위에 오르고나면 추가(가봉)로 세우는 석비
태실과 석비
보수할 때 개체한 석물들
주변의 우거진 솔숲
인종대왕태실을 내려와 오른쪽 계곡으로 조금더 올라가면 부운암이 있다
팔공산 깊은 계곡이라 얼음폭포가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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