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군 영해면 원구마을에 있는 영양남씨 난고종택(英陽南氏 蘭皐宗宅)은
국가지정 민속문화재 제271호(2012.4.13)이며,
영덕군 창수면에 있는 무안박씨 희암재사(務安朴氏 喜庵齋舍)는
문화재청에서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 예고(2022.9.19)하여 곧 지정을 앞두고 있다.
영덕에 있는 국가지정 민속문화재 두곳을 차례로 둘러본다.
영덕 난고종택 정침(正寢)
1)난고종택의 난고(蘭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지낸
성균관 진사 남경훈(南慶勳,1572~1612)의 호이며
난고종택 건물은 난고 남경훈의 아들 안분당(安分堂) 남길(南吉, 1595~1564)이
1624년(인조2년) 그의 아버지인 난고 남경훈을 추모하면서 건립했다고 한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난고종택
난고종택은 대문채, 정침, 만취헌, 불천위사당, 별묘, 난고정, 주사 등 총 7동의 건물로
구성돼 있는데,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생활상과 건축에 대한 의식이 잘 보존, 전승돼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먼저 사랑채인 만취헌(晩翠軒)이 자리하고 있으며,
좌측에 나란히 안채인 정침(正寢)이 배치되어 있고, 우측 사랑채 뒤로는
담장을 두른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과 별묘(別廟)가 있으며,
그 우측에는 별도 담장의 난고정(蘭皐亭)과 주사(廚舍)가 자리 잡고 있다.
안채인 정침(왼쪽)과 사랑채인 만취헌(오른쪽)
2,000여평의 넓은 부지에 세워진 난고종택은 대구시에서 오랜기간 근무하다가 퇴직한
16대 종손 남석규씨가 2007년 부친이 별세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혼자 집안팍 관리는 물론 "봉제사 접빈객" 등 종손의 삶을 살고 있다.
사랑채인 만취헌(晩翠軒)
원구(元丘)마을의 유래는 으뜸 거북이란 뜻으로 원구(元龜),
둔덕진 곳에 있는 들이라 해 뚜들 혹은 원두들, 으뜸 언덕이라는 뜻으로 원고(元皐),
넓은 평야가 있는 들이라는 뜻으로 원파(元坡)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마을에 먼저 터를 잡은 것은 진성이씨이며 현재는 영양남씨, 무안박씨, 대흥백씨 등
세 성씨가 주류를 이루는 동성마을이다.
만취헌 대청마루
만취헌은 난고 남경훈의 3세손인 만취헌 남노명이 낙향하여 지은 별당이다.
병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이던 남노명은 폐비 민씨 사건으로 환멸을 느끼고,
거창현감으로 자원해 부임했다가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종택 본채 옆에
대청이 있는 건물을 지은 뒤 만취헌이라고 하고 여생을 보냈다.
당호의 편액 글씨는 당대 명필인 성재 이진휴(省齋 李震休, 1657~1710)의 글씨이다.
*만취(晩翠)의 뜻은 늙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는 삶의 지조를 비유한 것이다.
만취헌 마루에서 보는 난고정쪽(2023.5.4)
안채 남측 부엌문쪽의 장독대
빨갛게 익어가는 석류
안채 뒷편
안채 내부
장독대
사랑채 뒷편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과 별묘(別廟)
체천위별묘(遞遷位別廟)
체천위 별묘란 고조부까지 4대만 신위를 모시고 봉사손의 대수가 끝난
신주를 최장방(崔長房)의 집에 옮겨 제사를 받드는 신위를 말한다.
이때 최장이란 자손중에 서열이 가장 어른이거나 같은 항렬에서 서열을 매길 때
나이가 자장 많은 자라는 뜻이다.
체천위가 있는곳은 이곳 만취헌과 영천 만취당등 아주 드물게 젼해져 오고있다.
체천위별묘(遞遷位別廟) 건물
사당앞의 난고정으로 가는 사잇문
난고정(蘭皐亭)과 주사(廚舍).
난고정
난고정앞의 주사(廚舍)
주사는 난고정을 찾는 손님들의 취사 등을 준비하는 곳으로 부엌과 방이 있는데
부엌에서 문을 열지않고 밖을 내다 보며 얼굴을 식별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나무틈새가 있다.
정원
만취헌 남공 수식(晩翠軒 南公 樹植)과 대문채(안쪽)
이 표석은 자미화(백일홍,배롱나무)를 약 400여년전에 남공이 심었다는 내용의 표지석이다
대문채의 난고구택 현판
안채앞의 모과나무
가지런하게 쌓아놓은 땔감에서 종손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진다
영덕 무안박씨 희암재사(盈德 務安朴氏 喜庵齋舍)
2)창수면 수리에 있는 영덕 무안박씨 희암재사(盈德 務安朴氏 喜庵齋舍)는
문화재청에서 2022년 9월 19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 예고(30일간)하였다.
예고기간이 지나면 문화재위원의 심의를 거쳐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하게된다.
덕후루(德厚樓)
이 집은 1700년대 건물로 임진왜란 당시 경주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무의공(武毅公)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분암(墳庵) 성격의 재사건축으로
전면에는 덕후루(德厚樓)라는 편액이 걸린 누문이 있고, 안쪽은 집희암(集喜庵)이라는
편액이 걸린 재사가 위치하며, 덕후루와 집희암 사이에는 좌우 익실이 연결되어 있다.
집희암이 있다는 안쪽건물은 문이 잠겨있어 보지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 분암(墳庵)이란 묘소 주변에 사찰을 세워 승려로 하여금 묘소를 지키게 하고
선조의 명복을 빌며 정기적으로 제를 올리기 위해 건립한 암자를 말한다.
희암재사 측면
영덕 무안박씨 희암재사는 분암으로서의 성격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재사건축이자
불교식 묘제사에서 유교식 묘제사로 넘어가는 의례복합공간으로 당시 사회의 변화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문화유산이므로, 문화재청에서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 예고하였디.
박의장(朴毅長,1555~1615 )은 아버지인 박세렴(朴世廉, 1535~1593)이
이 지역의 유력 집안인 영양 남씨 남시준(南時俊)의 딸과 혼인하면서
처가인 영해 원구리로 옮겨와 살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박의장, 박홍장이 태어났다.
집희암 뒷마루
23세 되던 1577년(선조 10)에 별시 무과에 급제하여 주부(主簿:종6품)에 제수되었다.
1588년 진해현감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경주판관이 되었고,
임진왜란 때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큰공을 세워 일등공신으로 녹훈되었으며,
1602년 경상좌병사 및 공홍도수사(公洪道水使)를 거쳐 경상도 병마벌도사가 되었다.
사후 호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비각과 석비(덕후루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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