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사천시 곤명면에는 세종대왕과 그의 애손 단종의 태실지가 있다.
이곳의 태실은 1929년 경기도 양주군으로 이전되었고 현재는 석재의 일부가 남아 있다.
세종대왕 태실지는 세종대왕의 태(胎)를 봉안하는 태실이 있던 곳이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에게 생명을 준 것이라 하여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했다.
특히 조선 왕실은 국운과 관련이 있다하여 태를 더욱 소중히 다루었으며
전문담당기관인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설치했다.
세종대왕 태실지 석물
조선 왕실은 세종대왕의 탄생을 경하(敬賀)하기 위하여 태실을 봉안코자
풍수지리가 제일 좋다는 이곳 태봉산(胎峰山 : 당시 소용산)을 택하여
세종 원년(1419)에 태실을 설치하였다하며, 태실 봉안시에 석물은 충청도에서,
지물과 집기는 전라도에서, 식량과 사역은 경상도에서 담당하였다고 전해온다.
태실도감에서는 태를 사람의 신체 가운데 근원이라고 보는 도교사상과
풍수지리설에 기초하여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태를 봉안할 명당을 물색한 다음
안태사(安胎使)를 보내어 태를 묻도록 했다.
세종대왕의 태는 세종이 왕위에 오른 1418년에 이곳에 봉안되었는데,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에 의해 도굴되고 파손되었다.
조선 조정은 1601년(선조 34)에 대대적인 수리를 했으며,
1733년(영조 9)에 다시 태실 비석을 세우고 태실을 정비했다.
"세종대왕 태실(世宗大王胎室)" 석비
일제강점기 세종대왕의 태실이 길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일본은
1929년에 조선 왕조의 정기를 끊기 위해 전국에 산재한 왕실의 모든 태실을
경기도 양주로 옮기고, 태실이 있던 땅을 모두 민간에 매도했다.
이곳에 있던 세종대왕의 태실도 이때 양주로 옮겨갔다.
영조 임금 때 세운 비석과 주변에 흩어져 있는 석조물을 통해
이곳이 세종대왕의 태실 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현재 태실비와 태실 석재 일부만이 이곳에 모아져 보호, 관리되고 있다.
수습된 석재는 탑좌(塔座)에 약간 파손이 있는 귀부(龜趺)와
태홍(胎缸)을 안장하는 중동석(中童石), 상개연엽석(上蓋蓮葉石), 석난간(石欄干),
난간지대석(欄干地台石), 전석(磚石), 팔각대석(八角臺石) 등이 이곳저곳에서 수습되어 있다.
세종대왕 태실비와 석물(石物) 9점을 근거로 하여 복원된 태실의 모습은
중앙 팔각의 대석위에 중동석과 상개연석을 놓은 뒤에
주변에 전석을 깔고 팔각으로 석난간을 설치하였다고 추정된다.
세종대왕 태실지 앞 들녁(동향)
세종대왕 태실지 오르는 계단
'그곳에 가고싶다 > 부산.울산.경남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해에서 봄 마중을 (0) | 2023.03.11 |
---|---|
밀양향교 고매와 금시당 운용매의 향기 (0) | 2023.03.11 |
영산 3.1민속문화제와 만년교 쥐불놀이 (0) | 2023.02.28 |
거창 수승대 출렁다리 (0) | 2023.02.18 |
매화향 그윽한 통도사 봄소식 (2) | 2023.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