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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대전.충청권

아! 8.15 "흙 다시 만져보자"

by 안천 조각환 2023. 8. 15.

광복절 노래

 

1.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독립기념관 겨레의 탑과 겨레의 집

 

단기(檀紀) 4278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항복선언을 하면서 

그 순간 우리나라는 드디어 일제치하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게된다.

그리고 온 천지에 "만세"라는 함성이 크게 울려 퍼진다.

단기만 쓰던 우리나라는 1962년 1월 1일부터 서기(西紀)를 쓰기 시작했다.

 

겨레의 탑

 

4278년 해방되던 해 태어나 해방동이가 된 나에게는

광복절의 의미가 항상 남다르게 느꺄져 광복 78주년을 맞은 올해 

천안의 독립기념관을 오랫만에 다시 찾아본다.

 

2.꿈엔들 잊을건가  지난일을 잊을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에 보람 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겨레의 집

 

겨레의 탑 앞의 김구선생 상

 

전시관앞의 독립투사 상

 

왼쪽부터 윤봉길의사, 안중근의사, 김좌진장군

 

전시관 내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韓國光復軍 總司令部 成立典禮) 사진

 

광복군 투사들이 친필 서명을 한 태극기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 

 

이봉창 의거

 

독립군들이 한 겨울 눈위를 걸었던 신발

 

전시실에는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이야기가 전시되어있다

 

조선 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

 

조선 총독부 청사 건물은 1926년 경복궁 숭례문구역을 철거한 터에 건립하였으며,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자 1945년 9월 9일 미 군정청에 인계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정부가 청사를 인수하여 중앙청(中央廳)이라 하였다.

그해 5월 10일 청사 중앙홀에서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개의를 하였으며,

1948년 8월 15일에는 청사 앞뜰에서 역사적인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거행되었다.

 

중앙청(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부재 전시공원

 

그러나 1950년 북한의 6.25남침으로 인민군 청사로 사용하였으며

그해 9월 26일 대한민국 국군이 탈환하여 중앙청 청사위에 태극기를 게양하므로서

국민들에게 환희의 기쁨을 주기도 했던곳이다.

그러나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방화를 하여 내부가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1962년 11월 22일에야 파괴된 청사를 복구하여 중앙청 본청 개청식을 하였다.

이 후 서울정부청사 신축시까지 대한민국 정부청사로 사용하였다.

 

청사 중앙지붕의 첨탑

 

1986년 8월 21일 청사 개보수 작업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이 후 청사의 철거와 보존간에 각계 각층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경축식 시 중앙돔 첨탑(랜턴) 해체를 시작으로 

1996년 11월 13일 완전 철거하였으며, 1998년 8월 8일 독립기념관에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을  개원하였다.

 

건물 첨탑

 

건물의 상징과도 같았던 첨탑은 높이가 8m, 무게는 30t이다.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기념식 시 가장 먼저 해체된 부재이다.

 

정초석(定礎石) =주춧돌

 

 철거된 청사 건물은 당시 일본 본토와 식민지  중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으며  

동양최대의 근대식 건축물이었다. 지층과 지상 4층 총 9,600여평의 건물로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벽돌로 기둥사이의 벽을 체우고,

외부를 화강석으로 마감한 뒤에 돔 모양의 중앙 탑옥을 얹었다.

르네상스양식에 바로크양식을 절충한 네오르네상스 양식이었으며, 

조선은행과 철도호텔에 이어 조선에서 세번째로 아홉대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었다.

 

측면 중앙부 석조 장식물

 

각종 부재들

 

철거 부재공원 전시물

 

무궁화와 겨레의 탑

 

 

겨레의 집 앞 호수

 

겨레의 탑 무궁화 석조 조형물

 

더운 날씨임에도 많은 관람인파가 찾고 있다

 

독립기념관 인근 유관순 열사 유적지를 찾아

 

생가와 오래된 낙우송 두 그루

 

유관순 열사 생가 입구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에 태어 났으며 

이화학당에 다니던 중 서울의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고향으로 내려와 

1919년 4월 1일 3천여 명이 참여한 충청지방 최대의 독립만세운동인

아우네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생가 전경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지만, 그 안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폭행과 고문을 받았고, 결국 1920년 9월 28일 순국하였다. 

 

유관순 열사 생가 비문

 

유관순 생가 마을입구의 태극기 게양

 

유관순 열사 생가와 2km정도 떨어진곳의 조병옥 박사 생가

 

유석 조병옥(維石 趙炳玉, 1894~1962) 박사는 이곳 천안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인권은 아우네 3.1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3년간 옥고를 치른 독립투사이다.

미국 콜럼비아 대학 재학시 한인회, 흥사단 등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25년 "한국의 토지제도"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조병옥 박사 생가 전경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배후 조종자로 자목되어 3년형을,

1937년 수양동지회사건으로 2년형을  선고받아 각각 복역하였으며,

1945년 광복 후 송진우 장덕수 등과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조병옥 박사 생가앞의 석비

 

6.25동란때는 내무부장관, 1954년 제3대 민의원, 1956년 민주당 대표 최고의원, 

1958년 제4대 민의원, 1960년 만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신병으로 도미,

미 육군병원에서 가료 중  그해 2월 15일 6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추서되었으며

그는 "빈대 잡기 위해 초가 삼간을 태울 수 없다"는 신념으로  의회민주주의를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