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포고택은 경산 용성면에 있는 조선전기의 건축물이다.
난포(蘭圃)는 영천최씨 시조 최한(崔漢)의 14세손 최철견(崔鐵堅)의
아호이며, 난포고택(종택)은 그가 1546년(명종 원년)에 창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난포공실기(蘭圃公實記)에 전한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1975년) 되어있다.
난포고택 대문
1809년(순조 7)경의 막새기와와 1817년(순조 16)의 상량문이 있어
중수한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안채, 아랫채, 사당채, 수오당(守吾堂)이
현존하며, 대문간채, 사랑채, 중사랑채, 고방채, 방아실채 등 일부는
최근세에 복원하였고, 수오당도 용산(龍山)에서 이건하였다.
난포종택 표석
최철견(崔鐵堅,1548~1618)의 본관은 영천(永川, 윗대는 전주에서 분파),
자는 응구(應久), 호는 몽은(夢隱), 아호가 난포(蘭圃)로 검열 최해(崔瀣)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최희증(崔希曾), 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최역(崔櫟)이다.
사랑채
1576년(선조 9)에 사마시에 합격, 1585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 감찰, 형조좌랑, 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으며,
1590년에는 병조정랑이 되어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전라도도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찰사 이광(李洸)이 패주하자 죽기를
맹세하고, 전주 사민(士民)에 포고하여 힘껏 싸워 전주를 수호하였다.
또한 70 고령인데도 창의하여 대장이 되고 손자 최인수(崔仁壽),
증손자 최준립(崔竣立)과 함께 영천의 권응수(權應銖) 의병과 합세,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담너머로 본 건물들
1597년 수원부사로 임명되고, 1599년 내자시정(內資寺正),
1601년에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호조참의로 전임되었다.
1604년에 춘천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1608년 선조가 죽자 풍수지리설로 산릉(山陵)을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가 소를 올려 의논을 정하게 한 바 있다. 저서로는 몽은집(夢隱集)이 있다.
자귀나무꽃
내부에는 거주하고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담너머로 담아본다.
자료에 의하면, 난포고택은 넓은 마당에 서향한 안채가 있고
좌측에 남향한 아랫채, 안채, 뒷쪽 동남으로 사당이 있다고 한다.
수오당(守吾堂) 건물인듯
호두가 영글어 가는 계절
담밖에서 돌아본다
건물 사이로 보이는 안마당
무너진 한쪽 담장
담장옆 표고버섯 재배
안채와 사당사이의 떡살구나무
제일 뒤편의 사당
앞 담장의 능소화
이제 막 한두송이 꽃을 피우기 시작
담장안의 따뜻한 곳은 몇송이 피었으나 이달말은 되어야 만개할듯
난포고택 가는길목의 새로심은 진량 고가 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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