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은 학문을 사랑하고 문장을 사랑한 임금이었다.
때문에 학자이자 문장가인 김종직을 총애했으며, 그 제자로서 문장이
웅위하고 화려한 조위도 총애했다. 조위는 훈신 조석문의 당질이었고,
대유 김종직의 문도요, 거기에다 임금의 총애까지 더해져 그 배경은 화려했다.
경복궁 근정전 용상
그러나 관직생활의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다.
화려한 배경이 오히려 동료 관원들의 시기를 사서 독이 됐기 때문이다.
조위는 1454년(단종 2년) 김산군 파미면(현 김천시 봉산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는 태허(太虛)이며, 호는 매계(梅溪)이다.
매계구거(梅溪舊居) ~ 매계 조위의 생가
창녕 조씨는 신라 진평왕의 사위인 조계룡이 시조이다.
중시조는 태조 왕건의 사위 조겸이며, 김천 입향조는 조심(曺深)으로,
좌찬성 조경수를 파조로 하는 찬성공파의 후손이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조경수(曺敬修)는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을 한 조민수(曺敏修)의 동생이다.
창녕조씨 시조 조계룡(曺繼龍)의 묘
조위는 1473년(성종 4년) 성균관에 들어갔고,
관시(성균관 유생들만 볼 수 있는 문과 초시)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리고 이듬해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정자에
임명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매계 조위(梅溪 曺偉)선생 초상화
"조선왕조실록" 성종 5년 3월 기록에는
“내관을 보내 신숙주, 한명회, 조석문의 집에 선온(임금이 신하에게
내려주는 술)을 내려주었다. 신숙주의 아들 신형, 한명회의 조카 한언,
조석문의 당질 조위가 급제했기 때문에 하사한 것이다” 라고 기록돼 있다.
경복궁 사정전
여러 급제자 중에서도 훈신의 아들과 조카, 그리고 당질을 특별히
우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는 정희대비의 섭정시기였기 때문에
훈신의 힘이 막강했다. 정희대비는 조석문의 당질 조위를 승문원정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예문관검열에 제수했다. 특혜였다.
경복궁 교태전 후원
예문관의 선배인 봉교 안진생 등은 이를 시기하여, 곧 있게 될
신고식 때 임금이 하사한 선온을 구관들에게 맛보이라고 부추겼다.
그래야 사랑받는 후배 관원이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조위가 그해 겨울 현감 신윤범의 딸과 혼인했을 때도 구관들을
집으로 초대해 연회를 베풀라고도 부추겼다.
경복궁 모란
그러나 이때는 가뭄으로 인한 흉년으로 금육령과 금주령이 내려져 있었다.
과거시험에 열중하느라 권력의 속성을 몰랐던 순진한 신속인
(新屬人: 새로 관직에 나온 사람) 조위는 음모가 있는 줄도 모르고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안진생 등은 그 사실을 사헌부에 고했고,
조위에게는 집에서 근신하라는 벌이 내려졌다.
경복궁 근정전
그러나 정희대비는 조위가 훈신 조석문의 당질임을 감안해 출사하라는
명을 내렸으며, 그러자 안진생 등은 경연(經筵)에서 성종임금을 알현하고,
“유생들이 처음 과거에 급제하면 구관원들에게 음식을 차려 대접하고
예문관에 모여 "한림별곡"을 노래하는 신고식 풍속이 있습니다.
경복궁 교태전 내부
그런데 조위는 육고기를 금하라는 어명이 있었음에도 고기를 준비해
구관들에게 대접했고, 집으로 기생과 악공을 불러 풍악을 울리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런 큰 죄를 범하고도 뻔뻔스럽게 입시(入侍)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라고 아뢰었다.
경복궁 안내 동판
"한림별곡"은 고려 고종 때 한림의 유생들이 지은 경기체가로,
모두 8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작자는 불분명하며, 여러 선비가 지었다는 기록과
8장으로 구성된 점으로 미루어 한 사람이 한 장씩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진사대부들의 득의에 찬 노래로, "당당당 당추자" 같은 음조로
흥을 돋워 신나고 흥겹게 부를 수 있다.
창덕궁 돈화문
안진생 등의 말을 들은 임금은 그러나 대수로울 것 없다는 반응이었다.
군주의 과실을 기록하는 사관이 그런 짓을 한 것은 옳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있을 필요까지는 없으니 나와서 근무하게 하라는 하교였다.
이렇게 무마되는 듯싶었던 금주령 위반 문제는 그러나 며칠 후
더 큰 사건으로 새롭게 불거졌다. 안진생 등의 밀고가 있었을 때
사헌부가 연회에 참석했던 기생과 악공들을 잡아들여 고신했는데,
고신 도중 그만 기생 앵아가 죽고 말았다.
창덕궁 회화나무
사헌부는 그 사실을 숨겼지만 이 일은 끝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임금은 사헌부 관원을 불러 자초지정을 캐물었다. 사헌부 관원은 단 한 번의
고신이 있었을 뿐인데 죽어버렸다고 고했다. 그러나 임금은 믿지 않고
주서 이창신에게, “국문으로 인해 죽은 사람을 모두 조사해 보고하고,
사헌부에 가서 태장(笞杖)이 법식에 맞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검사해서
불법이 있으면 밝히라!” 라고 전교했다.
창덕궁 인정전 내부
주서 이창신이 사헌부를 감찰했는데, 그 과정에서 안진생 등이 신고식을
핑계로 신속인들에게 연회를 강요했으며, 자신들도 연회에 참석해서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임금이 안진생 등을 벌하려 했다.
그러자 사헌부는 조위도 함께 벌해야 한다고 청했다.
창덕궁 후원
그래서 안진생 등에게 곤장 70대에 고신 2등을 추탈하는 등의 벌이 내려졌고,
조위는 고향 김산(지금의 김천)에 부처됐다. 고향에 내려간 조위는
김종직의 서원처럼 이용되던 직지사에 들어가 수행했고,
김종직의 문우인 김맹성의 가르침을 받으며 학문을 보강했다.
이듬해 2월 부처가 해제됐다.
김천 직지사
스승 김종직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시를 지어 사면을 축하했다.
화전(한림)의 고사가 그대의 허물이 되었다고
고개 밖의 계산에서 밝은 표정으로 우스갯소리 하더니
듣건대 옥황의 사면 교지가 이르렀다니
봄바람에 실려 들려오는 말발굽소리 경쾌하겠네.
화전고사위군루(花甎故事爲君累) / 영외계산소어청(嶺外溪山笑語淸)
문설옥황소식도(聞說玉皇消息到) / 춘풍응득마제경(春風應得馬蹄輕)
하지만 조위는 관직에 복귀하지 않았다.
직지사 사명각(四溟閣)
4월에 당숙 조석문이 좌의정에 임명되면서 조위를 사가독서
명단에 포함되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다. 임금은 사가독서에
선발된 문신들을 송도(개성)에 가서 쉴 수 있게 배려했다.
조위, 채수, 권건, 유호인, 허침, 양희지 등은 송도에 가서
어울리며 주고받은 시편을 모아 "송도록"을 엮었다고 한다.
천불전(千佛殿) ~ 직지사에서 임진왜란을 모면한 유일한 건물
조석문은 가을에 병으로 사직했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조위가 사가독서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는 정희대비의 섭정이
끝나고 성종임금의 친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위는 홍문관정자에 임명돼 "독서당기"를 지어 임금께 바치는 것으로
첫 업무를 시작했다. 임금이 집현전을 대신해 공해(公廨)를 독서당으로
개조하면서 조위에게 그 내력을 기록하라고 하명했기 때문이었다.
창덕궁 대조전(大造殿)
커다란 집을 짓는 자는 먼저 가시나무와 녹나무, 소태나무와
가래나무의 재목을 몇 십년 또는 몇 백 년 길러 반드시 공중에 닿고
동학에 솟은 연후에 그것을 동량으로 쓰게 되는 것이요,
만 리를 가는 자는 미리 화류와 녹이(주나라 목왕이 타던 준마)의
종자를 구하여 반드시 꼴과 콩을 넉넉히 먹이고 안장을 정비한 연후에
가히 연나라와 초나라 먼 곳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니,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어진 인재를 기르는 것도 이와 같음이라.
이것이 독서당을 지은 사유이다. 조위가 지어 올린 "독서당기"를
읽어본 임금은, “백관 중 문장은 매계가 단연 으뜸이다”라고 칭찬했다.
1481년(성종 12년)엔 어명으로 "두시서(杜詩序)"를 지었다.
"두시서"는 "두시언해"를 발간하게 된 내력과 의의 등을 적은 서문이다.
"두시언해"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연구하고 한글로 번역한 책으로,
국어국문학 연구와 한시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승화루(承華樓)와 삼삼와(육각형 정자) ~ 세자를 위한 공간인 중희당의 부속건물
성종임금의 조위의 시문에 대한 총애는 남달랐다.
조위가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청해 나갔을 때도 조위의 문장을
그리워하여 매년 지은 시를 뽑아 올리라고 하명할 정도였다.
조위는 어명을 받들어 자신의 시를 선별해 "세초시"를
엮어 올리고 쌀과 콩, 서책을 하사받았다.
'뿌리와 예의범절 > 梅溪 曺偉 先生'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조위(曺偉) ~ 4) (0) | 2024.04.30 |
---|---|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조위(曺偉) ~ 3) (0) | 2024.04.29 |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조위(曺偉) ~ 1) (0) | 2024.04.29 |
매계 조위선생의 매화 한시(漢詩) (0) | 2024.02.13 |
매계 조위선생 묘비 505년만에 다시 일어서다 (0) | 2023.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