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남아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랴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 / 두만강파음마무(頭滿江波飮馬無)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 /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
이 시는 조위가 지은 것이 아니고, 세조대의 무신으로, 이시애의 난과
건주여진 정벌에 큰 공을 세워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남이의 북정가이다.
가평 남이섬
1468년(예종 1년) 당시 병조참지였던 류자광(柳子光)은 자신이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던 뛰어난 장수 남이장군의 "북정가"에서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으로 바꾸고는, “남이(南怡)의 북정가에, "남아 이십의 나이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랴" 라는 말이 있으니,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오늘 저녁 남이가 신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혜성(彗星)이 나타나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그대도 보았소?" 하기에
신은 보지 못하였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남이가 말하기를,
"지금은 천하(天河: 은하수) 가운데에 있는데, 흰 광망(光芒)에 묻혀 쉽게
볼 수 없을 것이오"라고 하더이다. 신이 "강목"에서 혜성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니 그 주(註)에 이르기를, "광망이 희면 장군이 반역하고
두 해에 걸쳐 큰 병란이 있다"라고 되어 있더이다.
남이섬 숲길
신이 놀라서 쳐다보자 남이가 탄식하기를, "이것은 하늘의 뜻이므로
반드시 응해야 하오" 라고 하더이다. 그리고 한참 후 다시 말하기를,
"내가 거사하고자 하는데, 주상이 선전관을 시켜 재상의 집에 분경
(奔競, 벼슬을 얻기 위해 운동을 벌이는 일)하는 자를 매우 엄하게 살피므로
재상들이 반드시 싫어할 것이오. 수강궁(壽康宮)은 허술하여 거사할 수 없고
반드시 경복궁(景福宮)이라야 가하오" 라고 하더이다. 하고
예종임금에게 무고했다. 모두가 꾸며낸 거짓말이었다.
결국 남이는 역모 혐의를 받고 저자에서 거열형으로 처형됐다.
두보(杜甫) 시 서문
중국 당나라 두보의 시를 유윤겸, 조위 등이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했다.
그렇다. 남이가 그랬듯이 조위도 류자광의 모함에 빠져 유배를 가고,
끝내 배소에서 생을 마감한다.
조위는 성종의 조정에서 의정부검상, 사헌부장령,
승정원동부승지, 도승지, 충청도관찰사 등을 더 역임했다.
1495년 조위를 총애하던 성종임금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했다.
순천 옥천변 임청대 ~ 매계 조위선생의 유배지
조위는 연산군 조정에서 한성부좌윤, 성균관대사성 겸
춘추관지사를 역임했고, 어세겸, 이극돈, 유순, 성현, 권건,
신종호 등과 함께 왕명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어머니 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갔다. 조위가 삼년상을
마치고 돌아와 동지중추부사 겸 부총관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였다.
매계 조위선생 어머니 정부인 문화유씨 묘
훈구파로서 "성종실록"을 편찬하던 실록청 당상관 이극돈(李克墩)은
선왕 성종 대의 사관 김일손이 올린 사초에 자신의 비위사실을
기록한 내용이 포함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뇌물을 받은 사실과 성종의 상중에 기생과 어울린 일을 기록한 것이
그것이었다. 그 외에도 훈구파의 비리가 기록된 사초도 있었다.
성종대왕 실록
이극돈은 김일손을 불러서 그것을 못 본 것으로 해달라고 타협을 시도했다.
그러나 김일손은, “저는 선왕 때의 사관으로, 본 것을 못 봤다고 하라는
주상의 명에도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라며 거절했다.
야은 길재(冶隱 吉再,1353~1419) 선생 유허비(구미 채미정)
김일손의 할아버지 김극일은 길재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이고,
아버지 김맹은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 문하에서 수학하고
사헌부 집의를 지냈으며, 김일손은 할아버지 밑에서 "소학"과
사서(四書), "통감강목" 등을 공부하고
17세에 김종직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그렇기에 김일손은 이색과
정몽주, 길재의 학통을 대를 이어 계승한 성리학자 집안의 아들이었다.
청도 자계서원 문루인 영귀루(詠歸樓)
김일손(金馹孫,1464~1498)은 1486년(성종 17년) 스물세 살 때
사마양시와 식년문과 갑과에 모두 합격했다.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정자 겸 춘추관기사관을 역임했다. 진주교수로 나갔다가 사직하고
고향의 운계정사(雲溪精舍)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청도 자계서원(紫溪書院,탁영 김일손을 기리기 위한 서원)
그 후 다시 벼슬에 나아가 승정원주서, 홍문관박사, 부수찬, 전적, 정언,
홍문관수찬, 병조좌랑, 이조좌랑, 홍문관교리, 이조정랑 등을 역임했다.
현덕왕후(단종의 어머니)의 능을 복위할 것을 건의하고,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의 대를 이을 양자를 세우는 문제를 최초로
거론할 정도로 직언과 직서에 두려움이 없었고, 불의 앞에 굽힐 줄을 몰랐다.
자계서원의 수령 540여년된 은행나무
이극돈은 1457년(세조 3년) 친시문과에 정과로 급제해 전농시주부에
제수되며 관직에 나아간 후 강원도관찰사, 호조참판을 역임했고,
1474년(성종 5년)엔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병조참판, 예조참판,
사헌부대사헌, 한성부판윤, 좌참찬, 병조판서,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한 후, 1495년(연산군 1년) 연산군에 의해 우찬성에 임명되고
이듬해 좌찬성에 오른 훈구파의 거물이었다.
자계서원 강당
한때 김종직의 문도인 김굉필을 천거하며 신진사류와 친하게 지내기도
했던 이극돈은 김일손과 거래할 패를 찾던 중 김일손이 올린 사초에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화도연명술주"가 포함돼 있었음을 떠올렸다.
그 중 "조의제문"은 예전부터 훈구파 사이에 말들 많던 글이었다.
조의제문(弔義帝文) ~ 초나라 의제인 회왕을 조문하는 글
황우에게 죽은 초의제를 조상하는 듯한 글이지만
실은 단종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라는 말이 그것이었다.
이극돈은 김일손에게 이 말을 전하며 은근히 협박했다.
자신의 비위와 훈구파의 비리가 기록된 내용을 삭제해주면
"조의제문"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점필재 김종직선생 종택(고령 개실마을)
그러나 김일손은 "조의제문"은 스승 김종직이 꿈을 꾼 후 그 감상을 적은
글일 뿐이고, 그렇기에 성종도 그 글을 매우 즐겨 읽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걱정이 없지는 않아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있던
조위를 찾아가 의논했다. 성종임금의 명으로 스승의 시문을
정리하면서 문집에 "조의제문"을 실은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점필재선생 문집
조위가 김종직의 문집을 편집한 것은 김종직이 세상을 떠난 직후인
1492년이었다. 당시의 조위는 호조참판이었고, 성종임금은 조위와
정석견에게 김종직의 문집을 편찬하라고 명을 내렸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1431~1492) 선생 영정
조위는 김종직의 글 중에 뛰어난 것들을 골라 문집에 실었고,
성종임금이 좋아하기에 "조의제문"도 실었다. 정축년 10월 어떤 날,
내가 밀성(지금의 밀양)에서 경산으로 가다가 답계역에서 숙박할 때
꿈에 신이 칠장(七章) 의복을 입고 기연(頎然)한 모습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나라 회왕 손심이다. 서초패왕에게 살해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고 하더니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김종직선생 묘(밀양 생가 뒷편)
나는 놀라서 꿈에서 깨고 혼자 말하기를, "회왕은 남초 사람이요
나는 동이 사람인데, 서로의 지역이 만여 리 떨어졌을 뿐 아니라
세대의 선후 또한 천 년이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 무슨 상서로움일까."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의제를 조상하는 글이었다.
김종직선생 신도비
그러나 실은 세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고
또 죽임까지 당한 단종을 초의제회왕에 비유하여 은근히 세조를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조위는 스승이 그 글을 지은 뜻은
선비들에게 의로움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문제가 될 때 되더라도 선비답게 정정당당한 정도를 가자고 말했다.
문간공 노수신(門簡公 盧守愼,1515~1590) 영정
김일손이 타협에 응하지 않자 이극돈은 훈구파의 거물 류자광을 찾아가
그 문제를 의논했다. 류자광은 다시 노사신, 윤필상 등과 의논했다.
노사신과 윤필상 등은 이극돈과 훈구파의 비위사실이 드러나는 일이
있더라도 "조의제문" 문제를 터트려서 신진사류를 제거하고
훈구파가 다시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매계 조위선생 친필 시
다만 조위에 대한 임금의 신뢰가 두터우므로 무작정 공격해서는
승산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 고민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임금이
명나라 성절(聖節: 황제의 생일)을 맞아 성절사 정사로 누굴 삼을지를
대신들에게 물었다. 류자광과 노사신, 윤필상 등은 조위를 추천해서
그가 명나라에 간 후 도모하자는 꾀를 냈다.
매계 조위선생 신도비(김천 율수재)
훈구파는 조회에서 조위를 성절사의 정사로 삼아야 한다고 추천했다.
연산군도 조위만 한 적임자가 없다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조위는 사절단을 거느리고 명나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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