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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梅溪 曺偉 先生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조위(曺偉) ~ 5)

by 안천 조각환 2024. 4. 30.

조위(曺偉)가 명나라에 가고 없을 때였다.

류자광은 연산군을 알현하고, 김일손이 "성종실록"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으려 하는데, 그 의도가 매우 불순하다고 고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라? ”연산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경복궁 근정전 측면

 

세조조 때 있었던 노산군 사건에서 노산군을 초의제 회왕에 비유하고

세조조를 항우에 비유하여 세조조를 은근히 비난한 내용입니다.

류자광은 "조의제문"을 펼쳐 구절마다 풀이해서 아뢴 후,

이는 세조조의 정통성을 훼손함으로써 주상의 정통성까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대역부도(大逆不道)의 글입니다.

 

경복궁 경성전(慶成殿)

 

지금 이 조정에 그의 문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번 일을 그냥 넘기시면 그들이 주상을 또 그렇게 비난하며

자기들끼리 공모하여 일을 꾸밀 것입니다. 청컨대 법에 따라 죄를

다스리시고, 이 문집과 판본을 불태워버리시며, 이것을 선대실록에

실으려 한 김일손도 엄히 죄로 다스려야 하옵니다하고 아뢰었다.

 

경복궁 궁궐 지붕의 어처구니(토우)

 

류자광의 말을 그대로 믿고 격노한 연산군은 윤필상, 노사신, 한치형,

신수근 등을 수문당(修文堂)에 불러 모으고 김일손도 불러오게 했다.

네가 "성종실록"에 태조조(이성계)의 일(정몽주 격살사건)

기록했다는 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김일손이 오자 연산군이 물었다.

 

경복궁의 우물

 

옛 역사에 선시(先是)라는 말이 있고 처음()이라는 말이 있나이다.

지금을 알려면 처음과 앞의 일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춘추좌씨전을 쓴 좌구명도 이에 따랐기에 신도 그리하였나이다.

신이 국조보감(國朝寶鑑: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치적을 적은 책)을 보니

조종(祖宗: 이성계)께서는 왕씨(고려)를 끊지 않으시고 숭의전(崇義殿)을 지어

그 제사를 받들게 하셨고, 정몽주의 자손들이 목숨을 보전하게 다스리셨더이다.

 

경복궁 청연루(淸讌樓)

 

이 모두 조정의 미덕으로 당연히 만세에 전해야 할 일입니다.

김일손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면서도 두려움 없이 당당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성종실록"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은 의도는 무엇인고?”

성종임금께서 그의 학문과 문장을 사랑하시어 그가 죽은 후

그 시문을 모아 문집으로 만들라 명하셨는데,

그때 만든 문집에 있는 글입니다.

 

 

김일손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네가 우리 세조조 때의 일(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

정몽주의 일(이방원에 의한 격살사건)과 연관 지어 왕씨의 나라를

복구하는 것이 죽은 김종직의 뜻이라 사칭했다는데, 그건 사실인가?

그래서 조의제문을 실록에 기록했던 것 아니냔 말이다.

 

경복궁 후원의 굴뚝

 

연산군이 어좌에서 벌떡 일어나며 노기에 차서 소리쳤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제자 된 자가 어찌 감히 스승의 뜻을

왜곡하겠나이까.” 김일손은 펄쩍 뛰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믿지 않았고, 류자광에게 관련자를 국문해서

죄를 밝히라고 명했다. 무오사화의 시작이었다.

 

경복궁 사원전(舍元殿)

 

처음부터 작정하고 문제를 삼은 류자광이 사초사건의 조사를

맡았으므로  국문은 뻔한 과정으로 이어졌다. 김일손을 국문한

류자광은 강혼과 이희순 등도 잡아들여 공초했다.

또 김종직의 문집에 있는 "화도연명시"도 문제 삼았다.

김종직이 조위 등에게 보낸 시()"육군(六君: 여섯 군자)

성명이 이미 영(: 바다)에 올랐구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붕당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위 등으로 하여금

붕당을 하라는 유지라는 억지주장이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보이는 곳

 

중국 동한(東漢)의 당인들이 당을 이끄는 세 사람을

(三君)이라고 했는데 김종직이 말한 육군 또한 그와 같은

말이므로 육군에 해당하는 여섯 명을 공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은 그 여섯 명은 당시 휴가를 떠난 사람들이었고,

그 여섯 명을 존대하여 ()이라 칭한 것일 뿐이었다.

 

경복궁 북악산이 보이는 곳

 

류자광은 또 조의제문에 대해, “사람들의 충의가 격렬하여 읽는

자가 눈물을 흘린다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권경유를 잡아들였고,

연산군이 친국했다. 권경유는, “신의 생각에는 의제를 위해 조문

(弔文)지은 것이라 생각하여 그렇게 말했던 것일 뿐입니다라고

답했고, 류자광 등이 꾸민 거짓자술서에 서명을 거부했다.

 

 

모진 고문에도 끝까지 아프다 외치지 않았고,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류자광은 김종직의 문집을 편집한 조위와 간행을 한 정석견을

국문해야 한다고 아뢨고, 연산군은 승낙했다.

이때 조위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고 있었다.

 

창덕궁 회화나무 군(천연기년물 제 472호)

 

류자광은 군사를 보내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따라간 정승조와 함께

조위를 의주에서 검거했고, 한양으로 압송하여 빈청(賓廳)에서 국문했다.

조위가 명나라로 갈 때에 김종직의 문집을 싸가지고 갔다는데,

사실인지 국문하라. ”연산군이 직접 빈청에 나와서 하명했다.

 

창덕궁 진선문(進善門)

 

그 뛰어난 문장을 명나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가져갔나이다.

종직의 조의제문화도연명시 (육군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 시)

무엇인가를 가장했거나 돌려서 비방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신은 그것이 국조의 일에 범촉된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나이다.

그것이 부도한 문자였다면 어찌 감히 그것을 성종께 올렸겠나이까.

 

창덕궁 숙장문(肅章門)

 

조위는 그것은 류자광과 훈구파의 억지일 뿐이라고 답했다.

권오복과 권경유도 그것이 헐뜯어 평한 글임을 알면서도 함께

찬성했다고 실토했다. 그런데 어찌 너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조위는 큰 선비인데 어찌 그것이 부도의 글인 줄

몰랐겠습니까. ”윤필상이 거들었다. 신이 오면서 전해 듣기로,

그들은 결코 인정한 적 없고, 다만 류자광 일파가 거짓으로

초사(招辭: 공초문서)를 꾸며 올렸다 하더이다.

 

창덕궁 인정문(仁政門)

 

주상께서는 저들의 거짓놀음에 놀아나지 마소서.

공교롭게도 이번 사초사건에 연루된 관인 중에 류자광이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음을 고려하셔야 하나이다.

조위가 엎드려 호소했다.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그러나 이미 류자광을 비롯한 훈구파의 조작된 보고에

신진사류를 향한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던 연산군은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김종직의 제자들과 조의제문에 찬사를 보낸 자들을

모두 대역부도의 죄로 처벌하라고 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