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위는 그 후 김굉필과 함께 호남 순천으로 이배됐다.
순천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중 유배가사의 효시가 된 "만분가"를 지었다.
국한혼용체 2음보 1구의 127구인 만분가는 3·4조와 4·4조가 주조를
이루고 있는데, 안정복의 "잡동산이" 제44책에 수록돼 전하고 있다.
순천 유배 중 지어 유배가사의 효시가 된 "만분가"(한국 가사문학관 전시)
이 시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이가원으로, 1963년 세상에 소개했다.
작품해제에 "조위 호 매계(曺偉 號 梅溪)"라고 작가가 소개돼 있다.
"만분(萬憤)"을 있는 그대로 번역하면 "매우 원통함"이다.
그러므로 만분가에는 분하고 억울하고 괴로운 마음이 담겨 있다.
억울하고 원통하게 유배된 자신의 처지를 천상 백옥경에서
인간세계로 추방된 것에 비유하여 노래하고 있다.
한국 가사문학관
천상과 인간세계라는 설정을 한 이유는 유배가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만큼이나 충격적이고 억울하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사람, 자신의 결백을 알아줄 사람을
천상에 둠으로써 구원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즉 절망에 빠지지 않으려는 본능의 작용으로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가사는 겸손하고 정중하다.
매계 조위선생과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유배지였던 순천 옥천변
분노는 숨기고 또 숨겨서 그 끝자락만 살짝 내비친다.
옥황상제가 등장하는 조위의 다른 글이 있다.
성종이 노모를 가까이에서 봉양하라며 조위를 함양군수로 보내주고,
또 그 어머니에게 음식을 하사했을 때 조위가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올린 사은문이 그것이다. 사은문은, “명령이 자줏빛 대궐(紫宸)에서 나와
과분하게도 벌레만큼 미천한 저에게 관인을 내리시니 그 은혜가
초라한 띠집의 지붕을 적시옵는데, 학발(백발)의 부모에게까지
후히 하사하시니 삼가 아름다운 하사품을 엎드려 받고 떨리는 몸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로 시작한다.
매계 조위선생이 유배당시 돌을 쌓았던 임청대
당대의 최고 문장가답게 아름다운 수사를 사용했다.
그리고 도중에 “대궐을 생각하는 정은 깊어서, 자주 조간자(趙簡子)처럼
꿈에서 노닐었습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춘추전국시대에 "조간자"라는
사람이 꿈에 옥황상제가 계신 곳에 가서 황홀한 천상의 음악을
들었다고 하는데, 임금의 은혜에 그와 같은 황홀함을 느낀다는 뜻이다.
순천 옥천변의 옥천서원
조간자를 등장시켜 임금과 옥황상제를 동일시하고 있다.
만분가에서의 옥황상제는 조위의 억울함을 들어줄 청자이다.
조위의 마음속 옥황상제는 성종임금이다. 그러므로 만분가는
자신을 총애했던 성종임금의 혼령을 찾아가 심중에 쌓인 말을
실컷 털어놓으며 하소연하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송강 정철 가사문학의 터 식영정
유배가사란 귀양지에서 지었거나 유배를 소재로 한 가사작품을 말한다.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사미인곡, 그리고 그것을 모방한 김춘택의
별사미인곡과 이진유의 속사미인곡 등이 유배가사에 해당한다.
송주석의 북관곡, 김진형의 북천가, 이방익의 홍리가 등도 유배가사이다.
그리고 안도은, 안도안, 안됴원, 안도원, 안조원, 안도환, 안됴환, 안조환
등으로 알려져 그 이름이 확실하지 않은 작가의 만언사도 유배가사이다.
한국가사문학관에 전시된 조우인(曺友仁)의 자도사(自悼詞)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사미인곡, 그리고 조우인의 자도사,
김춘택의 별사미인곡도 천상에서 죄를 짓고 지상으로 유배를
오는 것으로 상황을 설정했다. 만분가를 처음 발굴한 이가원은
만분가가 굴원의 「이소」와 천문을 이어받고 있으며, 송강가사
(정철의 가사와 시조를 수록한 시가집)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식영정에서 보는 광주호
그가 그렇게 분석한 이유는 정철의 시미인곡과 속사미인곡의
"‘천상에서 죄 짓고 지상으로 유배 온" 상황 설정이 만분가와 닮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우인의 자도사와 김춘택의 별사미인곡도
조위의 유배가사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매계 조위선생 선영 아래의 마암재(馬巖齋)
조위는 귀양살이 중 병을 얻어 1503년(연산군 9년) 11월 26일
유배지에서 한 많은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한훤당 김굉필선생이 제문을 짓고 고을 사람들을 이끌고 예를 갖추어
상을 치렀다. 그때 동생인 적암 신(伸)은 금산(김천)에 있었는데,
선생의 병이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갔으나 이미 염을 마친 뒤였다.
황간(현 김천시 대항면)의 마암산(馬岩山)에 묻혔으나,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 복위 문제로 일어난 갑자사화 때 윤씨
폐출과 관련됐다하여 어세겸, 윤필상, 이극균 등과 함께 부관참시됐다.
문장공 매계 조위선생 묘
1506년(중종원년) 중종반정 후 복권이 이루어져 이조참판으로 증직됐고,
1708년(숙종34) 대제학이 더해지고 문장(文莊)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마암산 선영의 어머니 문화 류씨 묘역에서 수 년 전 지석(誌石)이 발견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2호로 지정됐다.
매계 조위 어머니 문화류씨 묘소 앞에 묻혀있다 발견된 지석(誌石,묘지명)
명문장가 홍귀달은 지석명문에서, “매계가 내게 말하길,
‘어머니께서 평생을 아름다운 덕으로 사셨는데 이것을 글로써
후세에 전하고자 우리 집안 사정을 잘 아는 그대에게 부탁하니
사양하지 말아주시오’라 했습니다”라고 적었다.
매계집 건,곤(梅溪集 乾,坤)
"조선왕조실록"에 “조위는 기량이 넓고 크며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기록돼 있다. 김굉필은 “선생의 재주와 생각은 일찍이
꽃봉오리처럼 날아오르고 그 명성이 온 나라에 진동했다”고 찬했다.
김천의 경렴서원과 황간의 송계서원, 순천의 옥천서원에 배향됐다.
저서로는 "매계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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