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서장(上書莊)은 신라말의 문신이자 대문장가인 최치원
(崔致遠,857~?)선생이 머무르면서 공부하던 곳으로,
그는 사양길에 접어든 신라의 국운을 쇄신하는 경륜을 담은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써서 진성여왕에게 올린곳이다.
상서장 출입문
최치원은 그가 12세되던 868년(경문왕 8)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헌강왕 11년인 885년에 귀국하여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고자 애썼으며, 특히 이때 시무십조를 올렸다.
출입정문과 추모문 사이
또한 왕건(王建)이 개국할 것을 짐작하고 상서하기를
“계림황엽곡령청송(鷄林黃葉鵠嶺靑松)”이라 하였다.
신라가 망하고 송도(松都)가 흥한다는 이 글을 보고 왕은 크게 노하였고,
최치원은 이후 벼슬을 버리고 경주 남산,가야산, 지리산 등 명산을 찾아
자연과 벗삼아 지내다가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문창후최선생상서장 비각
고려 현종 때 문창후에 추봉되고, 공자묘(孔子廟)에 배향하도록 했다.
이 때 최치원선생이 머물며 공부하던 이곳을 임금에게 글을 올린
집이라는 뜻에서 상서장(上書莊)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문창후 최선생 상서장 비(文昌侯 崔先生 上書莊碑)
이곳은 영정각(3칸), 상서장(5칸), 추모문(3칸),수호실(3칸)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874년(고종 11)에 건립된 상서장비가 있다.
영정각에는 최치원의 영정을 봉안하고 매년 4월에 제사를 지낸다.
추모문
상서장
영정각
영정각 내부
추모문 안쪽
최치원선생 전시관
출입정문 안쪽
정문으로 오른는 계단
계단입구의 최치원 시비
최치원의 한시 "범해(泛海) "는 28세 때 당나라 생활을 정리하고
신라로 돌아오면서 항해 도중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범해(泛海) ~ 최치원(崔致遠,857~?)
돛 달아 푸른 바다에 배 띄우니 / 괘석부창해(掛席浮滄海)
긴 바람 만리에 통하고 있네 / 장풍만리통(長風萬里通)
뗏목타고 떠난 한나라 사신 생각나고 / 승사사한사(乘槎思漢使)
약초 캐는 진나라 아이 기억나네 / 채약억진동(採藥憶秦童)
문창후 최치원선생 유허비(文昌侯 崔致遠先生 遺墟碑)
해와 달은 허공밖에 있겠지만 / 일월무하외(日月無何外)
하늘과 땅은 태극의 안에 있네 / 건곤태극중(乾坤太極中)
봉래산이 가까이에 보이니 / 봉래간지척(蓬萊看咫尺)
나도 이제 신선을 찾으려 하네 / 오차방선옹(吾且訪仙翁)
고운대(孤雲臺)
고운대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이 머물렀던 곳으로
위에는 상서장, 아래에는 문천(蚊川)이 흐르며,
신라 월성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후세 사람들이 이곳을 고운대라 하고 그의 충정을 기렸다.
고운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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