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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누.정.서원.향교

진주성에 얽힌 이야기 보따리

by 안천 조각환 2024. 5. 26.

진주성(晋州城)은 삼국시대에는 거열성,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

고려시대는 촉석성, 조선시대에는 진주성 또는 진양성으로 불렸다.

현재 성내에는 국립진주박물관,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 순의단,

촉석루, 의기사, 창열사, 호국사, 북장대, 서장대, 영남포정사,

촉석문. 공북문, 호국사 등의 시설과 유적이 있다.

 

진주성(북쪽)

 

진주성은 원래 토성이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년)에

진주 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축하였으며, 조선 선조24년(1591)

경상감사 김수(1537~1615)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을 쌓았다.

성의 둘레길이는 1.7km이다.

 

진주성(촉석루쪽)

 

선조 25년(1592)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2만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1593년 6월, 왜군 10만여명이 다시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여명의 민관군 모두가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진주성(남쪽 남강변)

 

선조 37년(1604) 합포(合浦,현 마산)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 온 이래로 경상우도 병마절도 영이 있었고,

고종 32년(1604)에는 진주관찰부, 1896년 8월부터는 경상남도

감영이 있었으며, 이 후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 도청이 있었다.

 

촉석루

 

진주성하면 가장 먼저 촉석루를 떠올리게 되는데

성안에 들어서면  2층 높이 건물의 우람한 촉석루를 볼 수 있다.

촉석루는 밀양 영남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히는 아름다우면서도 웅장한 건물이다. 

 

촉석루 누대 마루(천정 중간의 영남제일형승 편액)

 

영남제일형승(嶺南第一形勝)이란  "진주의 아름다운 산천은

영남에서 제일이다"라는 뜻으로 고려조 명종 때의 문신

이인로(李仁老,1152~1220)가 그의 파한집에서 한 말이다.

촉석루는 전시에는 군사를 지휘하던 장수의 공간이었고,

평시에는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의 공간이었다.

 

촉석루 누대에서 보는 남강

 

1241년에 세워진 촉석루는 여러 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듭했으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되었다가, 1618년에 예전의 것보다

더 웅장한 건물로 중건했으며, 1950년 6·25전쟁 때 다시 불에 탔다.

지금의 건물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을 거두어

중건한 것으로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누대이다.

 

촉석루 건물의 큰 글씨 편액들

위 : 촉석루(矗石樓),  중간 : 남장대(南將臺),  아래 : 영남제일형승(嶺南第一形勝)

 

촉석루(矗石樓)라는 명칭은 하륜의 "촉석루기" 에, “담암 백선생은

'강 가운데에 뾰족뾰족한 돌이 있는 까닭으로 누 이름을 촉석이라 한다

(江之中有石矗矗 故樓名曰矗石)' 또 이 누각은 김공이 짓기 시작하였고

안상헌이 두 번째로 완성하였는데, 모두 과거에 장원한 분들인

까닭에 장원루(壯元樓)라는 명칭도 있다.” 라고 하였다.

촉석루에 걸린 편액들

 

하륜이 지은 "촉석루기"에는 훌륭한 시영(詩詠)으로 면재 정을보

우곡 정이오(1347~1434), 상헌 안진(?~1360), 경은 설장수(1341~1399),

급암 민사평(1295~1359), 이재 허선생 등 여섯 명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정을보와 정이오의 시가 촉석루에 걸려있다.

 

촉석루를 읊은 가장 오래된 면재 정을보(鄭乙輔)의 한시

 

배율육운(排律六韻)

 

이름 높은 황학루도 한때의 일이러니 / 황학명루피일시(黃鶴名樓彼一時)

최공도 시 지어 남기기를 좋아하였네. / 최공호사위유시(崔公好事爲留詩)
올라보니 경치는 옛날 같은데 / 등림경물무증손(登臨景物無增損)

시를 읊는 풍류는 성쇠가 있네. / 제영풍류유성쇠(題詠風流有盛衰)


소먹이고 낚시하던 언덕엔 가을 풀이 시들고 / 우롱어기추초몰(牛壟魚磯秋草沒)
백로와 수리 놀던 물가엔 해가 저무네. 추량로저석양지(鶖梁鷺渚夕陽遲)
둘러앉은 푸른 산 모두 금방 그린 그림인데 / 청산사면개신화(靑山四面皆新畵)
분홍으로 치장한 세 행렬은 옛 노래 부르네. / 홍분삼행창고사(紅粉三行唱古詞)


옥피리 소리 멀어져가는 산 위에 달이 뜨고 / 옥가고비산월상(玉斝高飛山月上)
해 저물어 걷는 주렴에 고갯마루 구름 드리웠네. / 주렴반권령운수(珠簾半捲嶺雲垂)
난간에 기대어 둘러보니 시야가 좁아   / 의란회수건곤소(倚欄回首乾坤小)
우리 고을 아름다운 모습 확실하게 알겠네. / 방신오향특지기(方信吾鄕特地奇)

 

면재(勉齋) 정을보(鄭乙輔, 1285~1355)의  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면재(勉齋)이며, 평장사 정연(鄭椽)의 아들이다.

고려후기 정당문학, 찬성사, 광양감무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교은 정이오(鄭以吾)의 증조, 충장공 정분(鄭芬)의 고조이다.

 

촉석루에 걸린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의 한시 편액

 

흥망이 돌고돌아 지금을 기다렸나 /  흥폐상심직대금(興廢相尋直待今)

층암절벽 높은 다락 반공에 다다랐네. /  층전고각반공림(層巓高閣半空臨)

들판 건너 산줄기는 이어졌다 끊어지고 /  산종야외련환단(山從野外連還斷)

누각 앞에 이른 강은 넓어지고 깊어지네. /  강도루전활부심(江到樓前闊復深)

 

백설양춘(白雪陽春)은 선기녀(仙妓女)의 노래요 /  백설양춘선기창(白雪陽春仙妓唱)

광풍제월(光風霽月)은 사군(使君)의 심사로다. /  광풍제월사군심 光風霽月使君心

당시의 옛 일을 아는 사람 없는데 /  당시고사무인식(當時古事無人識)

고달픈 손 돌아와 속절없이 읊조리네. /  권객귀래공독(倦客歸來空獨)

 

교은 정이오(鄭以吾)의 묘(진주시 상대동)

 

정이오(鄭以吾,1347~1434)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

또는 우곡(愚谷). 본관은 진주이며 정을보의 증손(曾)이다.

이색과 정몽주의 문하생으로 길재와는 친구 사이이며,

문과에 급제해서 벼슬은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의암 사적비각

 

진주 관기 "논개"의 행적을 기록한 비(碑)가 있는 건물(비각)이다

 

진주 의암

 

의암(義岩)은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의기(義妓)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죽은 바위이다.

논개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의로운 바위라는 뜻의 의암이라 하였다.

 

 

진주 의기사(義妓祠)

 

위 왼쪽 : 의기사당, 오른쪽 : 사당 출입문인 지수문(指水門)

아래 왼쪽 : 논개 초상화, 오른쪽 : 의랑 논개의 비

 

진주 쌍충(雙忠) 사적비

 

쌍충 사적비는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제말장군과 그의 조카인 제홍록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제말(?∼1592)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웅천 ·김해 ·의령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고, 성주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제홍록은 숙부와 더불어 전공을 세웠으며,

이순신 휘하에 있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하였다.

 

그날의 아픔을 아는듯 모르는듯 남강은 유유히 흐른다

 

진주성벽의 석류나무(고목)

 

진주성 우물

 

이 우물은 진주성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우물로서 2013년 9월에 복원되었다.

 

김시민 장군상

 

김시민 장군은 1592년 10월 5일, 임진왜란 제1차 전투에서

군사 3,800여 명으로 호소카와 등이 이끄는 일본군 2만여 명의

공격을 받아 10월 10일까지 6일간 싸워 이를 물리쳤다.

육상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던 조선군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고, 결과적으로 곡창지대 호남지방을 지킬 수 있었다. 

 

진주성 중영(中營)

 

중영은 조선시대 경상우병영에서 중요한 업무를 수행한

우후(병마절도사의 참모)의 위상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우리나라를

지킨 핵심공간이자 경상우병영의 군사,행정을 관리한 중심 시설이다.

 

진주성 석굴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영남 포정사는 조선 광해군 10년(1618년)에 신축하였다.

고종 32년(1895년)에는 진주 관찰부, 건양 원년(1896년)에는

경상남도 관찰사 청사의 관문으로 사용되었다.

일명 망미루(望美褸)라고도 불리며,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도청의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진주성 비석군(비림)

 

조선시대에 세워진 30여기의 비석으로

진주시내 각처에 있던것을 이곳으로 한데 모은것이다.

 

경절사(擎節祠)

 

경절사(擎節祠)는 고려의 문신 하공진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향례를 받드는 사당이다. 1009년(목종 12) 중랑장의 신분으로

강조의 정변에 참가하여,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즉위시키는 데 공을

세워 상서좌사랑중이 되었다.  그는 현종의 사절로 거란 성종을 만나서

스스로 볼모가 되는 조건으로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경절사 정문인 경앙문(景仰門)

 

내삼문(사당 출입문)인 열일문(烈日門)

 

경절사 전경

 

진주 청계서원(淸溪書院) 정문인 창제문(蹌濟門)

청계서원 강학당(정교당,正敎堂)

 

진주 청계서원은 1833년(순조 33)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은열공(殷烈公) 정신열(鄭臣烈)과

고려 말 물레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면(木棉) 옷을 입게 한

문충공(文忠公) 정천익(鄭天益)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당시 훼철되었다가

1961년 복설(復設)하면서 봉남서원(鳳南書院)으로 불렀다.

 

경내 서쪽의 경덕사(景德祠,사당)

 

경덕사에는 은열공 정진열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경내 동쪽의 숭은사(崇恩祠)

 

숭은사에는 문충공 정천익(문익점의 장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각각 매년 음력 3월 15일에 제향하고 있다.

 

청계서원 전경

 

진주성 북장대(北將臺)

 

진주성의 북쪽 지휘소격인 북장대는 임진왜란 때

격전이 벌어진 곳이며, 1618년(광해군 10)에 병사 남이흥이 중건했다.

그 후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북장대는 내성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있어 낭떠러지 밑의

성 밖은 물론 성내와 외성에 포진한 병력까지도 지휘할 수 있다.

 

진주성 북쪽 성곽

 

전설의 용다리 흔적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싱그러운 진주성의 봄을 즐기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