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성씨의 뿌리인 시조 묘는 창녕 대지면 맥산(麥山)에 있다.
시조 성인보(成仁輔)는 고려 중기 때 향직(鄕職)을 역임하였으며,
묘소 뒤편에는 재실인 맥산재(麥山齋)가 있다.
창녕성씨 시조 묘소 가는길
창녕성씨 뿌리인 시조묘가 있는 맥산을 부리산(浮鯉山)이라고도
하는데, 지형을 물위에 뜬 잉어로 형상화한 것으로, 풍수 형국도
유어농파형(遊魚弄波形,물고기가 물결을 일으키며 뛰노는 형국)이다.
창녕성씨 시조 성인보(成仁輔)의 묘
창녕지방(昌寧地方)의 중윤호장(中允戶長)이었던 성인보(成仁輔)는
어느 해 정월초 왕(王)에게 신년하례(新年賀禮)를 드리기 위해
송경(松京,현 개성)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병사(病死)했다.
이때 조정에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던 그의 아들 송국(松國)은
아버지의 시체(屍體)를 지고 천리길 고향(故鄕)으로 내려온다.
이를 “천리부시(千里負屍)”라 한다.
성송국(成松國)이 창녕(昌寧)에서 30리쯤 떨어진 현풍현(玄風縣)에
도착했을 때 날이 어두워져서, 그곳에 여장을 풀고 하룻밤을 지냈는데,
다음날 아침 깨어보니 큰 눈이 내리고 시신(屍身)의 둘레에
범의 발자국이 찍혀져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아들이
이 발자국을 따라가 보니 맥산(麥山)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곳에는 온산이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었는데,
신통하게도 묘자리 하나 넓이만큼 눈이 녹아 있었다.
이에 아들 성송국(成松國)은 하늘이 점지해준 자리라 여기고,
거기에 아버지 시신을 모시게 됐다고 하는데 그곳이 바로
이 자리이며, 호랑이가 점지해준 곳이라 하여 호점혈이라 한다.
창녕성씨 시조 성인보의 묘비(옛 비와 새로 세운 비)
시조 고려 중윤 성공 인보 지묘(始祖 高麗 中尹 成公 仁輔 之墓)
멀리 보이는 화왕산
창녕성씨의 역사적 인물로 고려말(高麗末) 두문동(杜門洞) 72현(賢)의
한사람인 성사제(成思齊)가 있는데, 정승(政丞) 성유득(成有得)의 아들인
그는 녕위왕가귀 부작이가신(寧爲王家鬼 不作李家臣) 즉 "차라리 죽어
고려왕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이가(李家)의 신하는 될 수 없다"는
글을 남기고 두문동(杜門洞)에 은거(隱居)했다.
그리고 부인 성산이씨(星山李氏)에게 외아들 성두(成杜)와 함께
창녕으로 내려가 선산을 지키며 살도록 유언을 했다.
아들 이름을 막을두(杜) 자를 쓴 것도
조선에서 벼슬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창녕성씨 시조 성인보 신도비
(오른쪽 위) 고려중윤성공신도비(高麗中尹成公神道碑) 상단,
(왼쪽) 신도비 전면, (아래) 신도비각
판관 창녕성공 휘 근례지묘(判官 昌寧成公 諱 近禮之墓)
성사제(成思齊)선생은 고려말(高麗末) 두문동(杜門洞) 72현(賢) 중 한사람이다.
고려충신 정절공 성사제선생 신도비(高麗忠臣 貞節公 成思齊先生 神道碑)
왼쪽(상,하) 신도비 안내석과 신도비각, 오른쪽 신도비
맥산재(麥山齋) 전경
맥산재(왼쪽은 대문채, 오른쪽은 맥산재 재실)와 느티나무(보호수)
맥산재(재실)
맥산재 대문채와 전면(파노라마)
창녕 물계서원(昌寧 勿溪書院)
창녕 물계서원(昌寧 勿溪書院)은 창녕 대지면 모산리에 있는 서원으로
창녕성씨 시조 성인보의 아들 성송국(成松國)을 비롯하여 사육신 성삼문과
문묘에 배향된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 등 22위를 봉안하여 제향하고 있다.
물계서원 정문인 신현문(頣賢門)
또한 물계서원에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성혼(成渾, 1525~1598)의
우계선생문집(牛溪先生文集) 책판 284판을 비롯하여,
두문동선생실기(杜門洞先生實記) 책판 33판, 창녕성씨문행열전
(昌寧成氏文行列傳) 70판, 성시중효행록(成侍中孝行錄) 46판, 창녕성씨만력보
(昌寧成氏萬曆譜) 책판 22판, 창녕성씨기축보(昌寧成氏己丑譜) 189판 등
총 644매로 창녕성씨(昌寧成氏) 관계 문적을 새긴 책판을 보관하고 있다.
물계서원(勿溪書院) 강학당
이 책판들은 모두 창녕 성씨와 관계된 문적을 새긴 조선시대의 목판들로
서원철폐령 때 맥산재로 옮겨 보관하였다가, 1994년 물계서원을 복원하고
1996년에는 서원 경내에 책판고를 복원하여 책판을 다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창녕 물계서원 목판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책판들에는 창녕성씨 문중의 주요 인물들의 행적과 서적,
일화 등이 기록되어 있어서 창녕성씨 가계사를 살펴보는 것은 물론
조선후기 사회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들이다.
물계서원 앞마당
왼쪽부터 창녕성공 칠관공적비(昌寧成公 漆冠功績碑), 물계서원 사적비,
성암 성락삼지상(省庵 成樂三之像), 헌성금 명단비
창녕 석리 성씨고가(성부잣집)
창녕성씨 시조묘에서 우포늪으로 가다보면 길 오른쪽에
창녕 "성부잣집"으로 알려진 성씨 고가(古家, 옛 99칸)가 있다.
이곳은 북한 김정일의 처인 성혜림의 생가이며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당한 김정남의 외가이기도 하다.
정원
이런 연고로 이 집은 근세에 들어 수많은 역경을 겪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관리들이 처소로 사용하였다고 하며,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성혜림이 북한 김정일의 아들을 낳으면서
거의 폐허 수준까지 이르렀었다.
안채
그 후 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가 완화될 당시, 대부분의 가옥들을
복원하고 모든게 해소되는듯 하였으나, 다시 북한이 김정은 시대에
접어들면서 성혜림의 아들 김정남이 2017년 2월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당하고, 그 아들인 김한솔도 피신생활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면서
여전히 알게 모르게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석문동(石門洞) 표석
창녕 성씨는 일제강점기 양파를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해 재배한
문중으로, 아석(我石) 성규호(成圭鎬, 1832~1889)의 아들 성찬영이
1909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양파 재배에 성공하였다.
성찬영의 손자 성재경은 1950년대 후반 양파 채종에 성공하여
전국에 보급하였으며, 성씨고가 바로 옆에는 양파 시배지가 있다.
성씨고가의 석운재(石雲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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