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정씨의 도시조(都始祖)는 지백호(智伯虎)이다.
정종은(鄭鍾殷)의 후손인 정의경(鄭宜卿)이 영일호장을 역임하고
영일현백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그 후손들이 영일을 본관으로 정했다.
영일의 옛 지명이 연일로도 불려 연일정씨라고도 하고, 이들이
살고 있는 본 고장이 오천(烏川)이어서 오천정씨라고도 한다.
영일정씨 시조 재실 남성재 정문
영일정씨는 연원이 같으면서도 갈래가 다른 2파가 존재한다.
고려 의종 때 추밀원지주사를 역임한 정습명을 시조로 하는 지주사공파와
감무를 역임한 정극유를 시조로 하는 감무공파가 있다.
고려 추밀원지주사 형양 정선생 신도비(高麗 樞密院知奏事 滎陽 鄭先生 神道碑)
이들 두파는 선계가 실전되어 합보(合譜)하지 못하고 있는데,
지주사공파에는 포은 정몽주(鄭夢周)가 있으며, 감무공파에는
송강 정철(鄭撤)과 영의정을 지낸 그의 4대손 정호(鄭澔)가 있다.
남성재(南城齋)와 동.서재
포항 대송면 남성리에 위치한 남성재(南城齋)는 고려시대의 문신이며
영일 정씨의 시조인 형양공(滎陽公) 정습명(鄭襲明,1094~1150)을
추모하기 위한 재실로, 1722년 후손들이 묘소에 묘단을 짓고
제사를 지냈으며, 1742년 현 위치에 묘단과 석상(문인석)을 세웠다.
남성재(南城齋)
1751년에 묘단 위에 비를 세웠으며, 이듬해인 1752년에
비로소 재실을 건립하였으며 이후 2차례의 중수를 거친 후
1801년 옛 관청의 객사 자리에 개축하기 시작하여 정당 3칸,
재실 4칸, 부곡채를 합하여 총 14칸으로 1808년에 완성하였다.
남성재 편액
1858년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중수한 바 있으며,
현재는 대문채, 동재, 서재, 재실, 대종회관, 관리사 등이 있다.
매년 4월 영일 정씨 대종회에서 시조 형양공 단향제를 지낸다.
남성재 대청마루
영일정씨 시조묘는 실전(失傳)되어 알 수가 없었는데
1709년 경 훈수 정만양(鄭萬陽), 지수 정규양(鄭葵陽) 형제의 발의로
당시 영일 관아(迎日 官衙) 뒤의 정릉(鄭陵)으로 불리어온
대총(大塚,큰무덤)이 시조 형양공의 묘지가 있던 곳임을 고증하고
시조묘소를 설단(設壇) 하자는 논의를 일으켰다.
동재
당시 정만양, 정규양 형제의 3종숙인 오회당(五懷堂) 정석현
(鄭碩玄,1656- 1730)과 함께 순찰사 홍만조(洪萬朝,1645-1725)에게
영일현청(관아)을 허물고, 묘소를 복원하는 소(訴)를 제출하였다.
서재
1722년경 후손 만은(晩隱) 정세복(鄭世複)등이 새로 부임한
관찰사 지수재(知守齋) 유척기(兪拓基,1691~1767,호조판서 역임)에게
동일한 소를 제기하여, 1742년(영조18) 마침내 영일현의 관아를 옮기고,
그 자리에 시조 형양 정습명(滎陽 鄭襲明)의 설단(設壇)을 세웠다.
대문채 안쪽
남성재 측면
재실 뒤의 묘단으로 가는 사잇문
남성재 우물
관리사
묘단 가는길
묘단과 석상(문인석)
묘단(墓壇,설단)
설단은 석상과 함께 1742년(영조18)에 세웠다고 하는데,
현재의 설단은 그 뒤에 새로 세운것으로 보인다.
석상(문인석 좌.우)
석상은 1742년에 세운것으로 코가 특이하게 커서
신라 흥덕왕릉 등의 석상에 보이는 서역인을 닮았다
묘단 뒤에서 보는 전망
1751년에 세운 영일정씨 시조 정습명 묘단비(시계방향)
고려 추밀원지주사 형양 정선생 묘단비(高麗 樞密院知奏事 滎陽 鄭先生 墓壇碑)
영일정씨 대종회관
영일정씨 시조 재실 내성재 전경
내성재 오른쪽 산 기슭의 영일정씨 선조 제단비(迎日鄭氏 先祖 祭壇碑)
2세 정섭균(鄭燮均)에서 9세 정유(鄭裕) 까지 8위(位) 부부 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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