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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종택,고택,생가

여헌 기념관과 모원당(남산고택)

by 안천 조각환 2024. 8. 21.

여헌기념관은 구미(인동) 출신의 조선 중기 성리학자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가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론하던 동락서원 맞은편에 건립하였다.

 

여헌기념관 전경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 선생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써 당대 유학을 선도했고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 구현과 정치개혁을 촉구하였다.

 

여헌기념관 입구의 표지판(석)과 여헌선생 좌상

 

여헌기념관은 국.도.시비 18억원과 자부담 5억원 등 23억원을 들여

3천647㎡(1,204평) 부지에  2층 규모의 기념관을 건립(2008~2014)했다.

기념관은 상설전시실, 시청각실, 사무실, 수장고, 기획전시실,

강의실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문집, 부채, 우의 등 유품 16점을 비롯해

생애를 다룬 영상물 3편과 안내판 21점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 초입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천하에서 제일가는 사업을 할 수 있어야

천하에서 제일가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능주천하제일사업(能做天下第一事業)

방위천하제일인물(方爲天下第一人物)

 

전시실 안내판

 

제1전시실 ~ 여헌의 생애와 학문

(여헌의 생애, 여헌의 저술, 여헌의 우주사업, 여헌의 삶)

제2전시실 ~ 구미의 유학 전통과 여헌학

(구미의 유학 전통, 여헌의 깅학과 여헌학의 계승)

 

전시실 내부

 

유품들

 

여헌선생 영정

 

삿갓과 부채, 호패

 

여헌선생이 임종시 제자들을 불러 한 유언

 

오유(吾儒)의 학문은  마음에 근본하여 몸에서 닦아가는 것이다.

물뿌리고 비질하여 응대하는 것으로부터 천명(天命)을 아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격물치지(格物致知)로부터 공손함을 돈독하게 하여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데 이르기까지 그 사이의 큰 절목(節目)은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른에게 공손한 것을

십분 꼭 도리에 맞게 할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그것으로부터

더 나아가는것에 다른 특별한 법은 없다.

제군들은 늙은이가 있지 않다고 해서 소홀하게 여기지 말고 

내가 죽음에 임하여 한 말을 체행(體行) 하도록 하라. ~ 1637년 9월

 

세미나실

 

시청각실

 

벽에 써 붙여 살피는 글  /  좌벽제성(座壁題省) ~ 여헌 장현광

 

마음을 도덕에 머물게 하고 / 유심도덕(留心道德)

마음을 경과 성으로 세우다 /  입심경성(立心敬誠)

마음을 정일함에 보존하고 / 조심정일(存心靜一)

마을을 우주에 노닐게 한다 / 유심우주(遊心宇宙)

마음을 근신함으로 다스리고 / 치심근신(治心謹愼)

마음을 견고하고 바르게 한다 / 조심견정(操心堅貞)

마음을 허명한 곳에 있게하고 / 처심허명(處心虛明)

마음을 바르고 크게 유지한다 / 지심정대(持心正大)

마음을 담박함에 두고 / 처심담박(褄心淡泊)

마음을 고명하게 갖는다 / 완심고명(玩心高明)

본분에 마음을 편안히 하고 / 안심본분(安心本分)

역경에도 마음을 화평하게 한다 / 평심역경(平心逆境)

 

여헌기념관앞

 

모원당 솟을대문 ~ 인동장씨 남산종중 종택(남산고택)

 

담너머로 보는 모원당(慕遠堂)

 

모원당은 여헌 장현광이 임진왜란 이후에 살던 집으로 청천당과

사당인 여헌 묘우(廟宇)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는 후손들이 살고있다.

임진왜란 이후 집이 불에 타 기거할 곳이 없게 되자  만회당 장경우를

비롯한 친척들이 뜻을 모아 1606년에 지은 집이다.

 

마당의 회화나무와 중앙의 모원당 건물(4칸)

 

의성향교의 장현광 비각

 

현령 여헌 장선생 청덕비(縣令 旅軒 張先生 淸德碑)

 

인동향교 입구의 석비

 

현감 류후운룡 선정비(縣監 柳侯雲龍 善政碑)

 

류운룡(柳雲龍,1539~1601)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서애 류성룡의

맏형이며, 자는 응견(應見), 호는 겸암(謙唵),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사후에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비문은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이 썼다

 

마음씨 따뜻한 우리 현감님 / 개제오후(愷悌吾侯)

임금의 사랑 듬뿍 받았다네. / 위룡위광(爲龍爲光)

동화하면서도 물들지 않았고 / 화부동진(和不同塵)

청렴하면서도 물리치지 않아 / 청불격양(淸不激揚)

 

백성을 갓난아이 돌보듯이 하고 / 약보지여(若保之餘)

길재선생의 충절도 빛나게 하였네. / 윤색수양(潤色首陽)

그 덕을 이 빗돌에 새기나니 / 기덕정민(紀德貞珉)

낙동강물 넘실넘실 흐르네. / 낙수양양(洛水洋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