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암(馬岩)의 현재 행정구역은 김천시 대항면 복전리이지만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영동군 황간면이었으며, 선영아래 마암재(馬岩齋)가 있다.
이곳 선영에는 매계선생의 부친되시며 환(煥)자 항렬의 16대조이신
울진공 휘 계문(諱 繼門) 묘소를 비롯하여 15대조인 매계 위(梅溪 偉)의 묘소,
11대조인 참판공(參判公) 휘 제창(諱 悌昌), 참판공의 종제(사촌동생)되시는
휘 하창(諱 夏昌), 또 참판공의 둘째 아드님이신 경매당(景梅堂) 휘 술(諱 述)묘소와
그리고 9대조이신 인제공 세룡(認齊公 世龍)묘소를 비롯한 여러 선조들이
영면하고 계시는 곳으로, 묘사는 음력 10월 12일 청사제로 봉행한다.
마암재 전경(2023.8.25)
-매계 조위선생의 아버지이시며 울진 현령(증 가선대부)을 지냄-
증 이조참판 휘 계문 비문(贈吏曹參判諱繼門碑文)
공의 휘(諱)는 계문(繼門) 자(字)는 윤부(胤父)로 창녕인(昌寧人)이다.
증조(曾祖)는 증 문하좌랑중(贈 門下左侍中)으로 휘(諱)는 우희(遇禧)이고
조부는 봉익대부 밀직사사(奉翊大夫 密直司使)로 휘(諱)는 경수(敬修)이고
부친은 증통정대부 병조참의(贈通情大夫 兵曹參議)로 휘(諱)는 심(深)이고,
모친은 숙부인 서산정씨(淑夫人 瑞山鄭氏)로 태종14년(1414)에 공을 낳았다.
공은 삼군진무전농주부(三軍鎭撫典農主簿)와 현풍(玄風), 울진의 수령을 역임,
통훈대부품계(通訓大夫品階)에 이르렀고,
고향으로 돌아와 20여년동안 한가로이 지내다가
성종20년(1489) 2월 일에 금산(金山) 봉계리에서 76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으며
동24년(1493) 7월에 아들에 대한 은전(恩典)으로
희선대부 이조참판(喜善大夫 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공의 먼저 부인 하빈이씨(河濱李氏)는 일여(一女)를 두어
자헌대부형조판서 김종직(資憲大夫刑曹判書 金宗直)에게 출가하고,
다음부인 문화류씨(文化柳氏)는 일남 위(一男 偉)를 두어
현재 가선대부(嘉善大夫) 품계에 호조참판(戶曹參判)이고
측실(側室)의 소생은 6남 4녀로 아들 윤(倫)은 선약장군(宣略將軍)이고
전(佺)은 효력부위(效力副尉)이고 신(伸)은 통덕랑 사역원주부(通德郞 司譯院主簿)이고
장녀는 최송수(崔松壽)에게 차녀는 김식종(金諟種)에게 삼녀는 최맹준(崔孟濬)에게
출가했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공의 묘는 이해 5월 일에 황간 마암동 자좌(黃間 馬岩洞 子坐)에 모셔졌다.
성종24년 9월 일에 아들 위(偉)가 세우다.
증 이조참판 휘 계문 배 정부인 문화류씨비문
(贈吏曹參判諱繼門配貞夫人文化柳氏碑文)
부인(夫人)의 성은 류(柳)씨요, 문화인(文化人)이다.
조상인 휘차달은(諱車達)은 고려태조(高麗太祖)를 도와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녹훈(錄勳)이 대승(大丞)에 이르렀고 그 뒤로 휘공권(諱公權)과 아들인 휘택(諱澤)은
고려중엽(高麗中葉)에 참지정사(參知政事)와 승지(承旨)로 모두 명성이 있었고,
택(澤)의 아들인 문정공 휘경(文正公 諱璥)은 최충헌(崔忠獻)의 손자인 의(誼)를 베고
고려(高麗)의 왕실을 바로잡아 위두공신(衛杜功臣)에 녹훈되었고
경(璥)의 아들 휘승(諱陞)과 승(陞)의 아들 휘돈(諱墩)은 모두 높은 벼슬에 이르렀고,
본조(本朝)에 와서는 돈(墩)의 아들 휘량(諱亮)이 우리 태조(太祖)를 도운 공로로
좌의정(左議政)이 되었고, 량(亮)의 형 휘신(兄 諱信)도 높은 벼슬에 이르렀는데
바로 부인의 증조(曾祖)이고 신(信)의 아들 휘흡(諱洽)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고, 흡(洽)의 아들 휘문(諱汶)은 행주기씨(幸州奇氏)를 맞이하여 부인을 낳았고
부인은 증이조판서 창녕 조계문(贈吏曹判書 昌寧 曺繼門)에게 출가하여
일남 위(一男 偉)를 낳았는데 문장(文章)에 능하여 젊어서 과거에 응시하여
제6위(第六位)로 합격하고 성종(成宗)의 지우(知遇)를 만나 현재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있다.
부인이 연산왕 원년(燕山主 元年,1495) 10월 일에 69세를 일기로 금산 옛집에서 별세
이해 모월 모일에 황간에 있는 증이조참판공(贈吏曹參判公)의 묘에 부장(祔葬)하게되자
위(偉가 서울로 편지를 보내어 이제는 그만이요, 내가 다시는 어머님을 뵐 수 없게 되었소,
나의 어머님은 일생동안 많은 부덕(婦德)을 남기셨는데 이대로 인멸되어 버릴까 걱정이요.
숨은 덕행을 드러내 먼 후세에 보이려면 문헌이 없고는 아니 될 것이오.
더욱이 우리집안의 일을 잘 알기로는 공(公)만한 이가 없으니
공은 부디 어머님의 銘을 지어 달라. 고 부탁하였기에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애도(哀悼)해 하였다.
사실이 그렇다. 부인은 천성이 온화, 인자(溫和, 仁慈)하여 여러 종친을 대하는 데는
멀고 가까운 차별이 없이 일체 은(恩)과 신(信)을 위주로 하였고,
여러 측실(側室)을 거느리는 데는 조금의 질투도 없었고 여러 서출(庶出)을 양육(養育)하는데는
친생(親生)과 똑같이 하여 은애(恩愛)를 조금도 소홀이 한 적이 없었다.
평소에 화사한 것을 싫어하여 의복이나 음식이 검소하였고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하여
집에 저축될 여유가 없었고 제사를 모시는 데는 의례 손수 장만하여 그 성(誠)과 경(敬)을 다하였다.
노복(奴僕)들은 그 인자(仁慈)에 감화되어 아무리 부인(夫人)이 모르고 있는 일이라도
감히 속이려하지 않았고 이웃에서는 그 은혜에 감격하여 아무리 변변치 않은 음식이라도
의례 부인에게 먼저 드린 뒤에 먹곤 하였으니, 어질지 않고서야 어찌 이러하겠는가?
이 몇 가지는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므로 명(銘)을 지어 찬양할 만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문화(文化)에서는 류씨(柳氏), 창녕(昌寧)에서는 조씨(曺氏)로, 성(姓)은 쌍미(雙美)를 이루었고
한 아들은 명성이 높았으니 큰 벼슬로 문벌을 부흥시키고, 조상을 빛낸 이는 곧 관찰사이지만
부인(夫人)의 숨은 덕(德) 들어내고 맑은 행(行) 전파시켜 오랠수록 보존하는데
나의 글까지 있고 보니 금릉의 옛집과 황간(黃間)의 새 무덤은
그 광채 인멸되지 않고 천년만년 유지하리.
허백당 홍귀달 찬(虛白堂 洪貴達 撰)
문화류씨 묘갈석
문화류씨 묘소 가토중 묘정에서 발견된 매계선생친필의 "묘갈석" 탁본으로
묘갈석은 국립대구박물관에 위탁 보관중이다
문장공매계선생묘지명(文莊公梅溪先生墓誌銘)
공(公)의 휘(諱)는 위(偉), 자(字)는 대허(大虛), 창녕인(昌寧人)이다.
고(考,부친)의 휘(諱)는 계문(繼門), 울진현령으로 증(贈)에 이조참판(吏曹參判)이요,
조(祖)의 휘(諱)는 심(深)이요 증병조참의(贈兵曹參議)이며, 증조(曾祖)는 휘(諱) 경수(敬修)로
단성좌명공신밀직사(端誠左明功臣密直司)에 증의정부좌찬성(贈議政府左贊成)이다.
울진공은 문화류문(文化柳汶)의 따님을 맞이하여 경태(景泰,명나라 연호) 갑술(甲戌,1454) 7월에 공을 낳았고,
공(公)이 7세에 능히 시를 하였으므로 신기출인(神氣出人)이란 말이 있었다.
당숙부(堂叔父)인 조충간공 석문(曺忠簡公 錫文)이 보시고 기이하다하며 가숙(家塾)에
머물게 하고 글을 가르침에 날로 진전하여 임진(壬辰,1472)년의 사마양시(司馬兩試)에,
갑오(甲午,1474)년 문과에 발탁되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로 배명(拜命)받고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옮겨졌다. 성종(成宗)이 별도로 유신(儒臣)을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하여 최연소(最年少)의 공(公)을 뒷날 수직(首職,首相)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어 홍문관정자, 저작박사 수찬 사헌부지평 시강원문학 홍문관교리 응교
(弘文館正字, 著作博士 修撰 司憲府持平 侍講院文學 弘文館校理 應敎)를 역임하고
향리(鄕里)에 계신 늙은 어버이를 봉양(奉養)할 것을 청원하여 함양군수로 갔다가
이내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으로 제수(除授)받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옮겼다.
얼마 안되어 승정원동부승지 도승지(承政院同副承旨, 都承旨)에 이르렀으며,
호조참찬, 충청도관찰사,한성좌윤,성균관대사성,전라감사, 동지중추부사
(戶曹參判, 忠淸道觀察使, 漢城左尹, 成均館大司成, 全羅監司, 同知中樞府事)에 전임하였다가
홍치무술(弘治戊午,1498)에 명(明)나라 성절사(聖節使)로 갔다가 돌아올 무렵에
점필재 김종직의 시문집찬(詩文集撰)에 관련되어 의주(義州)로 유배(流配)되었다가
순천(順天)으로 이배(移配)되어 오래됨에 마침내 병으로 졸(卒)하니
홍치(弘治16년, 1503) 11월이라, 공(公)의 굉재박식(宏材博識)으로 문장이 가장 화려하여
당대의 문사(文士)들이 다 존경하고 지우(知遇)로 대접을 하였다.
성종(成宗)때 함양군령으로 있으면서 나라의 분부로 1개월에 한번 씩 시를 지어 올리니
그 글이 항상 임금의 포상(褒賞)을 받았다. 그 후 교체하여 임금의 측근으로 돌아와
얼마 안 되어 자주 높은 벼슬에 발탁되어 공보(公輔)에 이르더니
한번 내친 후는 마침내 돌아오지 못한 즉 애석하기 그지없다.
공(公)이 현김( 신윤범(縣監 申允範)의 따님을 취처(娶妻)했으나 무후하고 별세하였으며,
공의 여막에는 오직 신씨 부인(申氏 夫人) 혼자만이 울고 있었을 뿐이었으며,
서제 신(庶弟 伸)이 공(公)의 병이 위독(危篤)하다는 말을 듣고 달려왔으나,
이미 염습이 다 끝난 후(後)라 신씨(申氏)와 상의하여 공(公)의 생전(生前)에 정든
고향으로 관구를 모시어 명년 3월에 황간 마암동 선영(馬岩洞 先塋)옆에 안장(安葬)할새
내가 친분이 두텁다고 하여 묘표문(墓表文)을 청하여 이글을 끝으로 명(銘)을 짓노니,
매계선생 묘소(2023.8.25현재)
명왈(銘曰),
그 바탕 백옥(白玉)같이 정결(精潔)하고 그 자태 난봉(鸞鳳)처럼 의젓하여
세상을 위하여 하늘이 내린 귀인(貴人)임을 알게 하더니
비단 같은 마음에서 금수(錦繡)같은 창잔지라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온통 구름과 무지개 휘황찬란한 것 뿐 이었지
독득오두 화국문광(獨得五斗 華國文光) 햇살 되어 뒤덮였네
서쪽으로 귀양가서 용만(龍灣)에 한숨짓고 남쪽으로 옮겨살제 순천바다 거칠어라.
마침내 변방객사 외론 넋이 되었구나. 처첩은 있지마는 자녀는 하나도 없어
어느 뉘가 상제(喪制)되어 아비라고 불러줄까? 아우가 집상(執喪)하고 벗들이 조문하니
임이야 아까워 어이할꼬? 내는 슬픔을 삼키어 이 글을 짓는다.
천추만세 광음(千秋萬歲 光陰)이 흘러가도 산과 골짜기 제아무리 깊어도
그대의 맑은 향기 어찌 감히 막으리.
홍귀달 찬 (洪貴達 撰) -명부분 후손 영환 근역(銘部分 後孫 榮煥 槿譯)
(*홍귀달은 (1438~1504)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충청도관찰사·형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그 후 경주부윤·대사성·지중추부사 겸
대제학·호조판서 등을 지내고 좌참찬이 되었다)
-위에서 부터 차례로 참판공 계문, 매계 조 위, 평산신씨 묘소이며
문화류씨는 참판공 묘소의 왼편 나무사이로 보이는 곳
이조참판 휘 제창(悌昌) 묘소
참판공(제창)의 둘째 아드님 경매당(景梅堂) 휘 술(諱 述)의 묘소
9대조 인제공 세룡(認齊公 世龍)묘소
繼門(16대조)이하 - 世龍(8대조)까지 차례로 봉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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